전형필은 1960년에 아들이 귀한 집에서 태어났다. 팔도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못 가진 것 없이 살았다. 양아버지는 형필이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변호사가 되어 동족들을 구하길 바라셨다. 반면 전형필은 “왜놈들 재판정에서 왜놈들이 만든 법을 주워섬기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싶은 생각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고등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오세창 선생은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친의 많은 수장품을 재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일본으로부터 우리 문화재를 지킬 결심을 하고 그에게서 도움을 얻고자 찾아간 것이었다. 오세창 선생으로부터 '간송'이라는 아호를 얻은 것은 이 때다. 간송은 위창선생과 이름난 거간꾼이었던 이순황, 신보의 도움을 받으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귀한 전적과 서화들을 사들인다. 기호와 명성에 따르지 않고 우리 역사의 뼈대가 되는 의미 있는 유적들을 모은 탓에 오늘날 간송미술관은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간송이 <청자상감운학무늬매병>이나 신윤복의 <미인도>, <훈민정음>, <동국정운>등과 같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유물을 모으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모른다. 거사를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면 국토와 민족은 보전할 수 있다. 다만 5천년의 역사가 담긴 문화재들, 고고한 학이 울며 날개 치는 고려의 청푸른 하늘, 복숭아빛 뺨을 물들이며 새초롬하게 웃고 있는 천하절색의 미인, 세종대왕의 애민의 뜻을 담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는 역사의 저편으로 묻혀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거가 없는 국민이 어떻게 현재를 살고, 더 나아가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간송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독립투사요 운동가이다.
식민지 소년이 꿈꾸었던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 시세로 몇 십억이 넘는 돈을 주고 사들인 정선과 신윤복의 그림을 다시 보니 더욱 잔잔한 감동이 느껴진다. 일생과 전 재산을 쏟아 붓는 바람에 간송은 바보소리도 들었다. 미처 되찾지 못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아직도 바다 건너 일본에 있다. 내 것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안타까운데, 간송의 마음은 이보다도 더하지 않았을까. 그가 없었다면 ‘역사를 빼앗긴 나라’라는 모욕을 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소년의 ‘모자란’ 꿈이 당시의 미래를, 오늘의 우리를 빛나게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위인의 발자취가 만들어 놓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