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같이 난해하다. 어쩌면 설국보다도 더 난해하다. 조금 더 읽다보면 뚜렷한 윤곽이 나오겠지, 하며 더듬더듬 한 자 한 자 읽다보니 소설이 끝나있었다. 해설 하나 없는 2막의 희곡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결국 이 책 또한 앞서 읽은 설국과 마찬가지로 삶의 "허무", "허상",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래서 두려운 "미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에 관하여 독자에게 답없는 질문을 던진다.
책 속에서는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 현실에서는 우리가 찾는 궁극적인 행복, 유토피아, 신, 또는 죽음이 될 수 있는 무언가. 우리는 모두 무엇일지도 모르는 각자의 "고도"를 위해 기꺼이 일생을 바친다.
이 책 인물들의 의아한 점 한가지, 그들이 어제를 끊임없이 잊는다는 것이다. 마치 어항의 한 쪽 끝에 다다르면 반대쪽 끝이 미지의 세계가 되는 순진한 탐험가 금붕어처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제를 잊은 채 하루하루 같은 인생을 새로이 되풀이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 하는 이들에게 후회로 지새는 밤은 없다. 그들은 불행하지않다. 그러나 뚜렷한 변화 또한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오늘의 배고픔, 오늘의 기다림, 오늘의 절망. 오늘의 환희만이 존재한다. 단지 살아있음을 그때 그때 느끼는 것에 만족하는 정적의 인생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하게 약속을 지킬 누군가를 기다린다.
"우리는 약속을 받았으니까, 참을 수 있지. 걱정할 거 없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줄 고도가 나타나면 그들이 그간 감춰둔 감정을 한 번에 터트려버리기라도 할 듯이 극도로 절제되고 무덤덤한 말투로 고도의 등장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결국엔 지켜지지않을 수 있는 등장인 것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으며 말이다.
베케트 또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신기하다. 삶의 희망, 사람이 아닌 "허상' 그 자체가 그토록 중요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작가 그 조차 "고도"가 무엇인지 정의내리지 못 할 것이다. 아니 굳이 정의내릴 필요가 없다. 결국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 포조, 럭키 모두 작가의 초상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 포조, 럭키의 삶은 의미가 없는가? 모순적이게도, 책 초반에 나오는 구두가 벗겨지지않는 답답함, "고도"를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이 결국 우리의 인생이다. 고독, 고통, 그리고 기다림이 결국엔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매체이자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어느 누가 산모들이 겪는 출산의 망각,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망각의 축복을 멍청한 의식의 부재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무엇인가의 부재를 통해 더욱 더 깊게 다가오는 존재의 의미가 작가가 책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문인 듯 하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조금 씁쓸하다. 오지않을 궁극을 향한 기다림, 그 과정 속의 무 한 조각, 당근 한 개가 결국에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전부라니. 인간이 아무리 문명을 일구어내고 사회를 만들었다고 으스댄들, 어떠한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역시나 너무나도 나약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 더 넓게는 대자연 앞에 우리는 결국 하찮고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이 기다려야 한다. 당근과 무, 그리고 주변의 몇몇을 벗 삼아, 각자의 "고도"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