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서 후기
고전 5미닛 보고 책 받자
2018/10/31
1,531
내가 감상한 고전 5미닛 영상은 총 10개로,
-프린키피아 (아이작 뉴턴) 1687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하여 (아인슈타인) 1905
-법의 정신 (몽테스키외) 1748
-통치론 (존 로크) 1689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1859
-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49
-종의 기원 (찰스 다윈) 1882
-자본론 (칼 맑스) 1867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1920
-영구평화론 (임마누엘 칸트) 1795
이다.
(1)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의 법칙, 주기의 법칙)을 증명한 9쪽짜리 논문 <물체의 궤도운동에 대하여>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세 가지 운동법칙(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 이를 통한 태양계 행성운동의 원리가 설명되어 있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세상에는 물질과 운동만이 존재하므로, 힘이라는 것은 물체의 운동이 낳은 효과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뉴턴은 만유인력 및 중력과 같은, 외부에서 물체에 가해지는 새로운 힘의 개념을 과학에 도입했다. 뉴턴이 천체역학과 미적분, 근대 광학이론의 토대를 구축한 1666년은 과학계에 있어 기적의 해라고 불린다.
두 번째 기적의 해인 1905년은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제정되었다. (2)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하여>에 따르면, 특수상대성이론이란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의 프레임에서 시간과 공간의 뒤툴리 현상이 일어남을 밝힌 이론이다. 한편, 일반상대성이론은 가속운동의 효과가 중력의 효과와 동일하다는 발상에서 출발하여, (중력을 가진) 물체가 우주에 놓이면 그 주변 시공간이 휘어지고 다른 물체는 그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이론이다. 현대화된 중력이론이라고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태양 가까이 지날 때면 중력에 의해 휜 공간을 따라 빛도 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1919년 개기일식 당시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이 이현상을 직접 관찰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이 옳음을 입증했다고 한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초등학생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과학자들인데, 중력이라는 같은 현상에 대하여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특히, 뉴턴의 중력이론은 익숙했지만,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어서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태양의 질량 때문에 태양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져 있는 것이고, 지구가 그 휘어진 공간을 따라 미끄러져 움직이고 있는 (회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구와 태양은 언젠가 충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 아닐까?또, 태양을 따라 회전하고 있는 목성, 화성 같은 다른 행성들에서는 지구와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뉴턴의 이론과 달리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적용범위가 일상생활을 넘어서기 때문일 것이다. 즉,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틀린 쪽은 없다. 미시적인 범위, 일상생활의 범위에서는 뉴턴의 이론이, 거시적인 범위, 우주의 범위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현상을 더 잘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관찰범위에 따라 다른 도구(tool)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 전공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조직에서 개인을 동기부여하는 방법과 집단을 동기부여하는 방법이 다르고, 미시경제학의 이론으로 거시경제를 설명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말이다. 이를 정치체계에 적용하여, 정부를 세 개의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의 유형의 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tool)로서의 법률을 강조했던 사상가가 바로 몽테스키외이다.
샤를 보네는 ‘뉴턴이 물리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몽테스키외는 정신세계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1748년, ‘법이 다양한 정치체제의 구조, 풍습, 풍토, 종교, 상업 등과 가져야 할 관계에 대하여’라는 부제와 함께 출간된 (3)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법의 기본 원리와 함께 다양한 정치체제 속에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최적의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먼저 정부유형을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 세 가지로 나누며 각 유형의 작동원리가 각각 덕성, 명예, 공포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세 가지 중 어떤 형태이든 정부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는 각각의 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적절한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몽테스키외는 자유란 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이며 정치적 자유는 권력이 남용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하는데,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남용하기 마련이므로, 권력 남용의 속성을 방지하기 위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분립이라는 장치를 고안해 냈다. .
삼권분립론의 아이디어를 가장 처음 고안해 낸 사람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몽테스키외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의 부제에 있다. 법과 정치체제, 풍습, 풍토, 종교, 상업간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법의 보편성보다 지역성, 상대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이다. 이는 법률 간의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혔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의 서문에서 ‘각 나라의 국민은 자기들이 왜 자기네만의 원칙을 갖게 되엇는지 그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는데 이 문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몽테스키외도 책의 대부분을 서양의 체제와 역사에 대해 할애하고 동양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해서만 가볍게 언급하는 등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이 자유와 평등 개념을 먼저 ‘고안’해냈으므로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 전개에 빠지지 않은 것이 좋았다.
또, 몽테스키외의 입장은 (4)임마누엘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주장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칸트는 세계 평화의 관점에서 모든 국가의 체제가 공화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몽테스키외는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 세 유형을 모두 동등한 정부유형으로서 책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가 그의 책에서 로마제국이나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식민지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칸트처럼 세계시민으로서의 국가를 고려하면서 그의 이론을 전개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또, 몽테스키외의 정부유형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정치제계의 우월성을 극단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영상에서 소개되었듯이 노예제에 대해서는 반대하면서도, 즉 ‘천한 인간’의 존재는 부정하면서도 귀족이나 왕과 같은 ‘고귀한 인간’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모순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또, 책을 읽어보면 우매한 군중들에 의해 국가가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공화정보다 군주정을 더 옹호하고 있다는 뉘앙스 역시 지울 수 없다. 포퓰리즘 정치, 성찰 없는 정치에 대해서 비판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나친 엘리트주의로 빠지는 것 역시 위험할 것이다.
몽테스키외보다 60년 정도 앞서서 권력분립에 대해 주장한 사람이 바로 존 로크이다. (5)존 로크는 1689년 발표한 <통치론>에서 절대군주(절대권력)을 비판하고, 국가는 개인의 자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전제 아래 입법권의 독립과 시민 저항권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입법권과 집행권의 분리가 필요한 이유도 알 수 있는데,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부에 법 집행까지를 위탁하면 권력이 너무 비대해져 엄격한 법 집행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법을 집행하고 유지하는 것은 행정부, 즉 왕과 장관들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로크는 비록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 하더라도 개인이 주권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기에 시민저항권과 혁명권, 즉 정부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보았다.
존 로크와 더불어 자유주의 철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 바로 (6)존 슈트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존 로크가 개인의 자연권 중 하나로서 재산권을 강조했다면, 밀은 인간 자유의 영역으로 (1)사상과 언론의 자유 (2)취향과 탐구를 위한 행동의 자유 (3)진리와 결사의 자유 세 가지를 꼽았다. 또, 밀은 진정한 자유란 개성(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대중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이들에 의해 사회는 한 단계 더 발전한다고 보았다.
밀은 자유로운 근대사회에서 강자로 떠오른 다수에 맞서 사회가 개인에게 불필요한 통제를 가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호하고자 하였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시민운동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개인의 자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7)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서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먼저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파하면서, 당시 미국 정부의 노에제도와 제국주의 전쟁을 명백한 불의로 규정하고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도덕적 정당성에서 우위에 있다면 소수가 다수를 이길 수 있으며 한 사람이 얼마든지 다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밀과 소로의 공통점은 개인이 다수에 의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밀이 다양성 그 자체를 강조하고 사회의 원동력으로 보았다면, 소로는 당시 불의를 지지하고 있었던 다수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 밀은 개인이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소로는 법이 정의롭지 않은 경우를 상정하고 개인이 이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행햐는 부당한 일들에 저항하기 위해 소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인두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소로는 감옥에 갔다. 소로는 “만약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다면 그곳은 격리되어 있으며 실은 더 자유롭고 명예스러운 곳이며,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감옥이다”라고 말했지만, 자유인이 감옥에서 명예롭게 기거할 수는 있어도 감옥 밖에 있는 불의한 사회를 바꾸지는 못한다. 시민이 국가에 ‘불복종’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정부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존 로크의 시민저항권과 혁명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이다 (다만 로크가 시민저항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정의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권, 즉 생명권과 재산권 침해의 측면에서였다). 또, 밀이 주장한 것처럼,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국가의 행윙 대하여 시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찾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자연과학 분야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있다. (8)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근대 서양의 창조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종의 진화(evolution)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종의 진화란, 생물 집단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이를 축적해 집단 전체의 특성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종의 탄생을 일으키는 자연 현상을 의미한다. 진화의 핵심은 변이, 생존경쟁, 자연선택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변이(variation)란 어느 한 개체에서 나타나는 저마다 다른 특징으로, 후세에 유전되는 변이들이 다른 변이들과 뒤섞여 변화하고 진화한다. 생존경쟁이란 같은 종 안에서 각 개체들이 번식 경쟁을 한다는 개념이다. 한 개체가 번식할 수 없다면 진화의 기회도 사라지므로 번식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진화의 필수 조건이다. 자연 선택(적자 생존)이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변이를 일으킨 개체만이 생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생명의 시작은 너무나 단순했지만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무수히 많은 생물들로 어제도 오늘도 이 세상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라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나는, 이 영상에서 사람들이 다윈의 이론에 대해 ‘오해’라고 소개한 부분, 즉 ‘무한한 경쟁 속에서 최고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하는 것’이라든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곳이 우리 사회’라는 부분에 더 공감이 갔다.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어제도 오늘도’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의 진화의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 진화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생물 집단에 대한 변이가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이사슬 속에서 자연계는 죽고 죽이는 것을 반복하고, 이 와중에 적절한 변이를 가지고 있는 종은 생존하여 다음 세대에 자신의 변이를 물려준다. 즉, 기린이 서서히 목이 길어지도록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길이의 목을 가지고 있던 기린 중 목이 긴 기린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변이를 후대에 물려 준 것이다. 그렇다면 다윈의 이론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시사점은 결국 ‘어제도 오늘도 진화하는 우리’가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아 좋은 유전자를 미래에 물려주는 우리’가 아닐까?
다만 다윈이 발견한 종의 진화를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고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인간이지만, 환경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폴더형 휴대전화를 팔던 아이티 기업들은 시대에 맞추어 스마트폰과 완전평면 텔레비전을 개발하고 판매하며, 과학과 사회 이론은 연구를 거듭해갈수록 정교해져 간다. 오히려 다윈의 이론이 주는 시사점은 우리가 자연계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기에, 자연의 선택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또 환경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즉, 자연의 선택을 받고 생존경쟁을 계속하는 생물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더 나은 길로 발전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권의 나라들은 이슬람 회귀주의의 입장에 따라 점점 나라를 닫고 있고, 오늘날 이란의 여성 인권은 1970년대 이란의 여성 인권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표현하는 것도, 인류가 항상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지금의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되짚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최고만이 남고 나머지는 도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미래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인지가 우리 손에 달려 있어서 말이다.
프리드리히 앵겔스는 “다윈이 자연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그는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9)<자본론>을 쓴 칼 맑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가 부추기는 자본가(부르조아)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간 화헤 불가능한 계급적 적대관계에 대하여, ‘이윤을 향한 생산성 경재이 빚어내는 자본주의 경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영상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맑스는 <공산당 선언> ‘현존하는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생산양식에 따라 역사의 발전 단계를 5단계로 나누고(원시공산제사회-고대노예제사회-봉건제농노사회-자본주의사회-공산주의사회) 결국 인류는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상에서는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주로 다뤘지만, 나에게 맑스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와 같은 사회학자로서의 면모가 더 친숙하다. 사회를 계급간의 투쟁으로 보는 그에게 있어서, 로크나 홉스가 주로 다루었던 국가가 생기기 이전의 자연상태라든지, 국가가 지켜야 하는 자연권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앞서 소로가 미국 국민으로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는 것 정도의 불복종 방식을 뛰어넘어 단결을 통해 사회를 전복시킨다는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 외에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였을 당시 노동자들의 바참한 상황이 뼈저리게 다가오기도 하다.
맑스는 입증한 자본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은 대단히 논리적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몰락의 마지막 단계, 즉 상품이 재고로 쌓이는데 해고되는 사람들은 늘어나면서 시장은 침체되고 자본가는 몰락하는 단계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높은 실업률과 낮은 취업률, 문을 닫는 중소기업들,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정부 같은 현재 상황은 맑스가 말했던 마지막 단계와 똑 닮았다. 설령 지금이 자본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실제로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시장실패와 정부실패 사이의 어딘가에 있을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10)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밝힌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본질인 자본주의 정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베버가 밝힌 자본주의 정신이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그 정신의 구체적인 내용은 동양의 유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황금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다, 베버 역시 자본주의가 진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일하는 전문가만 남게 될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자본주의의 몰락이 꼭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이 자신만의 것, 즉 사유재산을 가지는 것은 (혹은 가지고자 하는 것은) 그 인간이 자신만의 눈, 코, 입, 팔과 다리를 가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우며 막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맑스 이론의 또다른 문제점은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유화가 곧 사유화의 반대말은 아니다. 때로는 국유화=독재자의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몽테스키외가 밝혔듯 권력을 가진 자는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인데, 국민과 동떨어진 공적인 존재로서의 국가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류가, 차가운 자본주의와 뜨거운 공산주의 사이의 어딘가에서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은 없다. 자본주의는 논리 필연적으로 몰락하게 되어 있고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사유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경제학적 측면에서 인류에게 남은 정답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앞서 다윈의 <종의 기원> 부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자 한다. 인류가 살고 있는 사회는 종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자연계와는 달라서, 가장 바람직한 것과 가까운 것이 저절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바람직하고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