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12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겨울에 성균관대학교 정문부터 도서관까지 천천히 오르거든 소소한 재미가 있다.
저기 철문께는 금색 빛에 검은 얼룩이 있는 고양이가 서식하고, 흰색에 검정 얼룩 그득한 고양이들이 문묘 부근을 항상 방황 중이다. 날이 적당히 춥고 적당히 햇볕이 내리쬐거든, 그 얇은 태양길따라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자니 맘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저기 철문부터 이어지는 길에서는 학생들의 아끼는 마음인걸까, 겨우내 잘 버티라고 집까지 몇 채 두어 있다. 내 집 구하기가 이리 힘든데 고양이는 지나가는 행인들이 집을 가져다 주니 정말 따스한 세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학교께 다가서거든 저기 그 화제의 중도냥이까지 있으니, 성대와 고양이 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음에 내키거든 무릎위에 앉아 가르릉 거린다고도 하는데, 정작 쓰다듬는 것도 제대로 못해봤으니 사람을 가리긴 하나보다.
애틋한 고양이를 위해 누군가 신청한 새 책이 와있었고, 죄송하게도 먼저 집어 읽어보았다. 아마 지나가는 길고양이에게 집이나 사료를 가져다 준 따스한 이의 신청도서 아니었을까.
이번 담론의 주제는, '양육론'이다.
'돌보는 행위' 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했지만, 돌봄론은 너무 대출이나 보험 같은 명칭이었다. 담론의 진지함을 위해, 특정 돌보는 행위를 통틀어 '양육론'으로 간주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실, 양육론이라기엔 너무 둥글고 모호한 기분이다. 책을 읽고 남은 어딘가 근질거리는 아쉬움을, 한 단어로 짚어내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었다.
책의 소개에 대해 먼저 간소히 짚자면, 지극히 행동 양식적인 실천 교본이다. 사실 지금 사는 집에도 길고양이가 너슨히 있어 혹 내가 행동하거든 이 책을 끼고 고양이를 돌보면 되겠구나, 싶더랬다. 간략히 어떻게 밥을 주어야 하나 부터, 작가의 애착과 애증이 담겨있는 듯한 중성화 시술의 중요성 언급에, 기타 고양이 분류나 포획, 입양까지. 지극히 한국에 있는 토종 고양이들의 행동양식을 오래 관찰하고 상호작용한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기에 책에 흐르는 감정선 또한 큰 줄기 몇 개로 얽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과, 길고양이의 관리의 한계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반(反)고양이적 행위를 하는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것이다. 물론 길고양이를 돌보며 겪은 일들에 대한 수기는 아니기에, 그 감정들은 명확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애니멀 호더나 동물 포획하는 이들에 대한 묘사, 캣맘이나 캣대디에 대한 비난에 대해 응대하는 방식에 대해 논하는걸 보면 이 책을 쓰며 작가가 얼마나 감정의 양 끝단을 훑어 왔는지 짐작이된다. 그 감정의 앞단에는, 이 명제가 놓여있다.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공존과 상생의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문득 의문이 든다. 고양이에 대한 애정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물론 이미 익히 경험해서 알고 있다. 보면 귀엽다. 본가에서 푸들 한마리를 키우고 개들과는 소통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본인이지만, 그럼에도 고양이의 매력이 강렬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마냥 귀여워서 우리는 이들을 돌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 생물학적으로는 가능하다. 유아기의 커다란 눈, 성체와는 다른 신체 비례등은 많은 포유 동물 유년기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인식되고, 이러한 '귀여운 형태' 는 모성이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는 말이 있잖은가. 사람의 아이도 다른 동물들이 돌본다는데 하물며 그 반대야. 그렇다면, 성체의 길고양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애정을 느끼고 돌봄을 행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 우리의 애정은 보다 거룩해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공존과 상생의 방법을 고려하는' 지성체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의 것이 아닌 지구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환경을 지배적으로 조작하는 생물군이다. 아마 개개인으로도 보다 상위의 지성활동을 한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양이에 대해 처우 방법을 결정하고, 배려해주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또 행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돌봄이라는 행위가 경계가 모호함에서 먼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간들끼리의 분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돌봄은 어떻게 묘사가능할까. 특정인의 보호범위 내에서 충분히 힘을 얻기까지 머무르며 지원받는 행위라고 명명하면 되지 않을까. 길고양이를 돌보는 행위로 돌아가면 그렇기에 우리는 저들이 힘을 얻기까지 밥을 주고, 물을 주고, 저들을 포획해 죽이는 행위에 대해 가림막이 되어준다. 이 행위에서 분쟁이 성립될 여지가 있는 지점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길고양이의 보호자가 누구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 순간까지 보호하느냐 이다.
양육의 대상이나 돌보는 대상의 범주는,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말 모호해져 왔다. 가까운 관계 또는 혹은 같이 생활하는 이들에 대해 양육한다? 그보다는 저 옛날 옛적의 예시를 가져와 소유의 관계로 해석함이 명쾌하다. 내 소유의 노동단위, 이 집단의 노동단위에 대해 어린 유년시절을 견딜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이 보호관계의 모호성은, 단순한 족장, 국왕의 소유 대상이었던 이들이 각각 대등한 개체가 되고, 가족관계가 흐려지며 깊어졌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누가 돌보는가? 이에 대해 오늘날 최소의 요건은 가족 관계나, 소유의 관계, 혹은 법적 권한의 대리 관계 정도는 되어야 납득이 된다. 내 가족을 돌보고, 내 애완 동물을 양육하고, 혹은 내가 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대상에 대해 돌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고양이는 여기서 어디 즈음에 해당하는가? 분명 내가 기르는 고양이와 길을 다니는 고양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대외적으로 나의 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 동물의 행위에 대해 책임질 여지도 없다. 분명 내가 먹이를 주고 예방접종을 맞힌들, 그 이상의 관계를 가지면 실질적으로는 입양하는 것과 차이가 사라진다. 하지만 누군가 기르는 고양이가 사고를 치고 상해를 입히면 주인에게 청구한들, 길고양이가 상해를 입히거나 분쟁의 요소가 된다면, 누구에게 청구해야 하는가? 만약 통상적인 돌봄의 범주였다면, 그 법적 대리인이 명확했을터이다. 그러나 길고양이와의 관계는 아무런 구속이나 제약 없이, 일방적인 돌봄을 제공함에서 문제가 깊어진다.
우리의 상생의 가치관이 모두에게 공유되어 이 고비를 넘긴들, 어느 시점까지 양육하는가가 문제이다. 인간을 돌본들 대개 성년까지라고 하지 않던가. 알아서 자립해 먹고 살아가는 순간은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본 책에 언급된 한계는 명확하다. 만약 캣맘이나 캣대디가 이사를 간다던지, 돌보는 행위가 끊기는 시점이 온다면 그 고양이들은 순식간에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다른 돌보는 이들에게 요청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자립을 위한 돌봄이 아닌, 무기한의 돌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통상의 돌봄 - 아픈 고양이가 회복하거나, 출산 전후의 고양이를 돌보는 행위와 전반적인 길고양이를 챙기는 것은 여기서 작은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 차이점들은, 지극히 캣맘과 캣대디에게 무력감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입양하기는 힘든 상황이고, 모두를 계속 챙길 수 없지 않냐는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광범위한 애정과 실질적 제약으로 인한 한계에서, 앞선 '돌봄'에 대한 인식차이로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까지 보인다. 길고양이를 포획해서 팔아버리고, 쥐약을 놓고 하는 행위에 대해, 책 전반적인 분노가 생생히 와닿는다. 그러나 보다 안타까운 것은, 저들을 처벌하는 방안이 모호하다는 현실이다. 저 길고양이가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닌 만큼, 동물 보호법이라는 간접적인 법으로만 처벌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나마 '미수'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당장 내가 아껴 돌보던 고양이가 잡혀간들, 즉각적인 대처가 힘든 것이 현황인 것이다.
농촌에서 쥐약을 살포하는 행위에 대한 언급은, 이 적개심이 과도히 표출된 형태가 아닌가 조심스레 말해본다. 본서에서는 '농촌에서 쥐약을 살포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동물학대에 대해 설명해도 설득할 수 없다'라고 논한다. 그렇기에 고양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라라고 지침을 준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동물이, 내 소유물을 파헤치고 못쓰게 만들 때 오늘날 우리는 동물학대를 먼저 떠올릴까? 나이가 많아 동물학대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기위해 병충해를 잡고 농약을 쓰듯 직관적인 행동이라 생각한다. 동물이 자기 영역 표시를 하듯, 소유물과 그에 대한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정신 깊게 박혀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은 분명 고귀한 것이지만, 그 가치가 명확해지는 순간은 역사에서 분명히 보여준다. 국가의 소유와 같이, 누군가에게 속해 있어야 생명은 그 가치를 저울질 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간혹 동물 관련 이슈를 보면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두가지 정도로 나뉘지 않나 싶다. 동물은 동물이지와, 쟤들도 인간처럼 느낀다는 논지가 그것이다. 사실 이 두가지 모두 핵심을 빗겨나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저 길고양이들이 지금 인간들의 세상안에서 돌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작게 여기에 덧붙이면, 돌보기 위해서는 지금 사회의 체계상으로는 어쩔 수 없다. 법적 권리를 갖는 것이 인격체인 만큼, 우리는 동물에게 법적 지위를 양도하는 이슈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 체계에서 제일 부합하는 논리는 소유의 논리고 재산의 논리일 수 밖에 없고, 우리는 동물을 소유함으로서 그들을 인간의 법 테두리 안에서 지켜줄 수 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행위는 이 지점에서 위험하다. 소유하지 않고, 돌봄을 행한다. 그리고 타인이 길고양이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다른 종류의 행위를 하거든, 제재를 가하고 싶어한다. 동시에, 우리는 저 길고양이들에게 나름의 인간 사회로의 사회화를 겪게 해야하고, 이로 인해 중성화 시술등의 요소는 반드시 필요해진다. 소유자가 없기에 비용을 처리하는 주체 또한 모호해진다. 세금으로 모두 처리하기에는 정부가 '누구를 우선하여 돌봐야 되는가' 와 같은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불과 십수년 전만해도 길고양이를 이렇듯 아끼고 가꿔줬을까. 그 때는 너무 어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소유에서 공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인식의 변화가 아닐까. 적어도 성대의 길냥이들은 모두에게 사랑 받는다고 믿는다. 이쯤 되면 공공재적인 대상 아닐까.
아마 다음의 고양이 보호 협회의 목표는, 이 길고양이들이 모두에게 공유되는 가치를 주는 것부터 확립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유의 개념이 완벽히 흐려지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대상이 되고 나서야, 길고양이들은 인간의 삶속에 그 모습 그대로 둥지를 틀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건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길고양이 글을 마친다.
성대 냥이들에게도 안부인사를 건네고자 한다. 다음 봄에는 몇마리로 늘어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