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작가도 밝혔듯이 영웅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사람들이어서 역사에 쉽게 휩쓸린다. 역사적 사건의 발생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역사에 휩쓸려 상처받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를 오롯이 몸으로 받아낸다. 이러한 김훈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을 보노라면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고 인간의 삶은 살아가는 동시에 살아지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공터에서” 역시 평범하고 먹고 살기 빠듯한 마씨 집안 삼부자와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조명한다.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 이도순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었다. 특히 아버지 마동수는 유년기 가족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며, 한국전쟁에서 이도순을 만났다. 이도순 역시 전쟁통에 남편과 아이를 잃어버리고 무당의 점괘를 되새기는 피난민이었다. 그들의 아들인 장남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가족과 한국을 등지고 괌으로 홀로 이민 가 현지인과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 사이 혼혈과 결혼한다. 그는 괌에서 사업가로 성공했지만 그것은 합법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범죄자로 전락한다. 차남 마차세는 집에서 홀로 투병중인 아버지를 수발하기 위해 휴가를 받고 나온 군인이었으며, 결국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마씨 집안의 사람들과 그 주변인물들은 모두 식민지, 전쟁, 대통령 암살과 같은 굵직한 사건의 중심과 떨어져 있지만 그 현장에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 영향 아래에 있다. 이들은 그 사건을 기점으로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않았으며 인생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완벽한 단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현장에 존재했다는 이유로 상처받았으며 이들에게서는 적의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세상과 생에 대한 허무가 남아있다. 결국 마씨 집안 사람들은 그저 살아갔을 뿐이며 동시에 살아졌을 뿐이다. 그들은 회피하지도 직접 맞써 싸우지도 하지 않았고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시대의 물결에 휩쓸린다. 특히 투병생활을 하는 아버지 마동수의 모습은 참으로 허무하다. 추운 겨울날 집에서 홀로 누워 자신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의식이 희미해짐을 느낀다. 병자인 마동수의 육체는 이미 생기를 잃고 퇴색되어버린 상태였다. 가족과 연을 끊고 아버지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은 장남은 홀로서기에 성공한 듯 보였지만 몰락하였고 자신의 몰락에도 그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이었다. 자신은 다가가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무섭게 다가왔으며 '도망칠 수 없었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채 허무가 담긴 눈길로 그들은 세상과 삶을 응시했던 것이다.
작가는 세상과 인간사에 대한 허무로 일관하며 어떠한 부정적이거나 희망적인 어조도 없이 마차세가 일자리를 다시 구해 그저 '살아지는' 모습을 묘사하며 작품을 끝냈다. 이렇듯 작가는 허무주의 혹은 허무주의에 가까운 태도를 꾸준히 드러낸다. 확실히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일상에서 오는 고단함과 의식주 같은 현실적 문제를 당장 해결해 주지 못한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꿀 능력도 없다. 또한 국가와 사회의 부도덕과 비상식을 직접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는 법과 기술로 대표되는 실용의 영역이며 역사는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을 제시하며 관망할 뿐이다. 역사의 큰 흐름은 필연적으로 조금씩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 속에서 약간의 진보와 약간의 후퇴가 반복된다. 흡사 인간이 무력한 존재로 비춰지지만 인간에게는 늘 선택의 기회가 있다. 역사는 사람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허무주의적인 결말을 냈더라도 우리는 이를 항시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