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가 <1984>와
<멋진 신세계>에 영향을 준 소설이라는 말을 봤을 때 나는 반드시 이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개인적으로 <1984>만이 나에게 '인상 깊었던 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1984>를 좋아하는데, 이 책의 원형이면 어떨지 정말 궁금했다. <1984>, <멋진
신세계>, <동물 농장> 전부 디스토피아 소설이며,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전체의 일부로 전락한
인간을 풍자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구덩이>의 시대적 배경이 1920년대 말 소련인것을 알았을 때 별로
놀랍진 않았다.
1920년대 말엔
러시아가 소비에트 연방이었는데, 스탈린은 정권을 잡고 집단화와 산업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사회적 계급을 지칭하는
이름으로는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빈농, 중농, 부농, 지식인 등등 여러 이름이 나오지만 이분화하자면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나누는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인데, 이 생산수단으로부터 경제력이 나온다. 부농과 관료주의, 자본주의 아래에서 혜택을 보는 사람 등의 유산계급이
부르주아이고, 노동자와 빈농, 중농 등의 무산계급을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다. <구덩이>에는 계급
또는 이념을 각각 인물 하나에 대응시켜서 나타낸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의 이상적인 노동자를 '치클린'이라는 인물로, 사회주의에
억압받으면서도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곰으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나스탸'라는 인물로 나타낸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인물들은 사회주의의 프롤레타리아가 모두 모여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을 건설하기로 하고 토공사를 한다. 이
토공사는 땅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의 미래라고 여겨지는 고아 소녀인
나스탸가 붙어 같이 살고 있었다. 나스탸의 엄마는
부르주아 출신이고, 나스탸는 계급 의식이 강하게 박힌 아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엄마가 '부르주아였기 때문에 죽었다' 라고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은 나스탸를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더욱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세우는데 열정을 가진다. 비유적으로 보면, 나스탸는 곧 사회주의이고,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집이란 곧 안전한
나스탸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끝내 완성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 나오는 '집단농장 건설' 사업에 인물들이 정신이 팔리기 때문이다. 빈농들과 중농들로 이루어진
집단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 집단화를 실시하는데, 이에 동참하지 않는 인물들과 부농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내쫓는다. 노동자들이 집단화의 물결에 휩쓸려서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나스탸는 병들어
죽는다. 나스탸를 자신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묻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사회주의가 살기 위한 집이, 사회주의의 무덤이 된 것이다.
여기선 사람들 한 무리가 존재의 상태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거야.
이 소설의
핵심 부분은 집단농장을 건설하면서 노동자들이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 사람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집단화하는 것은 그들의 사유재산을 공동의 재산으로 만들고, 어린아이들과 청소년, 노동자들과 농부를 단체에 귀속시켜 노동에서 삶의 본질을 느끼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위한 활동가도 있어서, 개인이 혼자 먹고 살 만한
것들은 모조리 압수하기도 한다. 종교단체도 타격을 피하진
못하는데, 돈을 내고 초를 사서 기도를 대신하는 교회와 그
교회의 신부도 비난받는다. 구덩이를 파던 인물들이 집단농장 사업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면서 너무 휩쓸렸기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진리에 대해 고민하는 '보셰프'라는 인물도 집단농장
사업에서 삶의 목적을 찾았다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실상은 모두가 가난하고 굶주린다. 노동자들에게 과잉 달성과 생산성 향샹의 압박이 너무 크게 작용하면서
사람들은 쉬어야 할 때도, 일할 것이 없을 때도 끊임없이 일하도록 강요받는다. 개인이 그저 전체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면, 혼자서 개인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개인이 아닌
무리로서의 사람이 '존재의 상태'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사람은 무리로 있을 때만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도 사회주의에서 지향하는 이념이 담겨있다. 한 무리의 말들이 사람
없이도 스스로 일을 하고 물을 마시고 먹이를 먹는데, 이탈하는
말 없이 모두가 질서를 지켜서 줄 지어 움직이면서 각자 필요한 만큼만 물과 먹이를 챙기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굉장히 잘 보여준다.
소설 자체는
어려웠다. 말이 시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이 굉장히 많이 사용되며, 일상적인 대화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인물들이 전부 다 깊은 질문들을 던진다. 러시아 소설이라 인물 이름과 별명이 헷갈리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을
전체의 부속품처럼 생각해서 개인의 존재와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계급없이 평등한 사회'라도 얼마나 불합리하고 모순될 수 있는가를 굉장히 잘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추구하지만 집단화의 물결에 떠내려가 '사회주의 노동자를 위한 건물 설립'이라는 이상을 현실화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유토피아가 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