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랑 비교하면
구운몽은 드라마와 비슷하다.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잔뜩 나와서는 사랑을 하고, 결국 행복하게 사는 얘기가 굉장히 유사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대리만족감이나 부러움 등이 구운몽에도 나와있다. 지금 드라마로 만들어도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배경이 현대가 되어도 충분히 어색함이 없을 내용인데, 그만큼 구운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시대를 아울러 필요한 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구운몽은 스승이
성진에게 현실 세계의 욕심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이야기이다. 성진은 여덟 선녀와 노닥거렸다는
이유로 인간의 아이로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책에는 성진이 여덟 선녀에게 단지 길을 비켜달라는
이유로 말을 걸고 비켜주는 대가로 과일을 건내 준 것밖에 없는데, 그게 그렇게 불순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글이 전부가 아니라 숨겨진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리 도를 닦는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한참 번식기인 성진과 여덟 선녀들이 눈이 맞은 게 엄청난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해진
짝과만 사랑을 나누어야 하고, 혼인하기 전에는 서로의 얼굴도 보지 못하는 옛날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큰 죄를 지은 걸로 여겨지던 성진으로서의 삶과 다르게,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양소유(성진)는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게 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태어난 양소유는 장원급제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한 것은 인간세상의 허무함을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부족한 것 없이 살았기 때문에 고생을 모르고, 원하는 걸 쉽게 쉽게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삶을 누리다가 한 순간의 꿈인 것을 알았을 때의 허무함을 성진에게
알게 해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소유가 가진 것 없는 집에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한
삶을 꾸려낸 다음에 꿈인걸 알게 된다면 어땠을까. 세상만사 다 부질없다고 생각되는 건 후자가 더 클텐데,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감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을 본인의 현실에 투영하여 지금 열심히 살아도 부질없다고 느끼게 되면, 구운몽이
지금 여겨지는 것처럼 길이길이 추천되는 책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방인’이나 ‘변신’처럼 실존주의
책의 한 종류로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책
전반에 걸쳐서 드러나지만, 양소유의 여색은 대단하다. 장원급제를
했지만 학문에 힘쓰는 모습은 나와있지 않고 오히려 예법을 어겨가면서 혼인 전에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애쓰기도 하고,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행위도 많이 일삼는다. 전쟁 중에 병사들이
물이 없어 괴로워하고 병들어갈 때에도, 양소유는 적인 자객 심요연과 정을 나눈다. 인어의 상태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서 몸에 비늘이 남아있는 백능파와도 정을 나누고, 정경패가 귀신인줄 알았을 때에도 부적을 써주겠다는 친구에게 화를 내고 계속해서 귀접을 하고자 한다. 그 외에도 철이 없고 여색을 많이 밝히는 모습이 계속해서 나온다. 인간의
인생 전반에 걸쳐 계속 여자를 만나서 관계를 충분히 하여, 잠에서 깼을 때 더 이상 여색에 관심이 없어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이런 부분은 소설의 재미를 더 하는 부분이고 크게 교훈을 담는 부분이
아니라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다면 그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자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이 쓰여졌었을 때 사회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월왕과 승상이 술을 마시면서 월왕이 승상에게 서로의 여자들의 재주를 비교해보자고 하고 승상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승상의 첩들이 각자의 재주를 뽐내는데, 포켓몬도 아니고 내가
받아들이기엔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승상으로
살아가면서 슬픔과 좌절은 없고 기쁨과 욕망만이 있던 삶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다 허상이었음을 인지할 때 그 얼마나 허무할까. 나라면 믿지 못하고 계속 잠을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꿈이기에 달콤한 것을. 현실의 쓰디 쓴 맛을 보며 버티고 버텨야 달콤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춘몽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