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구운몽은 나에게 어려운 소설이 아니었다. 비단 나만의 자만이 아닌 전국의 수험생들이 구운몽을 그렇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일장춘몽이라는 교훈을 중, 고등학생에게 쉽게 설명해주는 주제가 확실하고 읽기 쉬운 소설로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과서 속 등장하는 구운몽은 그야말로 친숙한 전래동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수능 준비를 위해 공부했던 만큼 이 책의 줄거리 및 주제는 완벽히 숙지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통 책의 줄거리를 미리 알아보지 않고 책을 읽어나가는 나는 평소보다 느긋하고 편한 독서를 예상하고 구운몽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총평은 악몽이었다. 순항을 기대했던 배가 태풍에 바다 괴물까지 만나 침몰하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내가 알던 구운몽이 아니었다. 고전문학이 풍겨오는 뻣뻣함과 불친절함이 내 몸을 조여 오는 것 같았으며 정경패, 난양공주, 진채봉 등 총 8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양소유의 이야기는 그리 교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 여성에게 인생을 바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줄거리가 주인공이 계속해서 여자를 바꿔가며, 심지어 귀신같은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까지 추파를 던지는 바람둥이 소설이 내가 알았던 구운몽의 실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육관대사가 성진의 그릇됨을 가르쳐주기 위해 고집스럽게 여성과의 만남을 의도한 것은 알겠으나 온종일 이성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 것은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설은 주류 문학이 아니었으며 구운몽의 작가인 김만중은 양반이었다. 양반이 이런 종류의 오락성 소설을 실제로 썼는지가 의아해질 정도의 소설이었다.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을 외우기도 벅찼으며 각주가 달려있는 단어들도 많아 근래 읽었던 소설중 결말을 보기 위해 가장 기를 써가며 읽은 책이었다.
고전 소설은 대학교에 올라와 처음 접해봤다. 처음에는 굉장히 애를 많이 먹었다. 분명히 한글인데도 불구하고 책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보통 200쪽 가량의 소설을 독파해 나가는 데에 삼일이 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 이해가 안가는 문장은 다시 살펴보고 기억이 나지 않는 등장인물은 앞으로 찾아 가 읽어보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다. 하지만 소설이 거의 끝날 때쯤에는 고전소설의 문체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멋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시중에 존재하는 즉 내가 이전에 알았던 구운몽은 현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된 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때 당시의 분위기를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했으며 원작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라고 한다. 사람을 형용하거나 배경을 형용하는 문장들은 정갈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단순한 직유법임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풍경화가 펼쳐진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하나 소개하자면 ‘온갖 꽃이 골짜기에 가득하였으니 붉은 안개가 낀 듯 하고 새들의 다채로운 소리는 봄기운을 연주하며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렇듯 사물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방법과 시야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는 선생님 같은 작품이었다.
인생이 덧없음을 느낄때가 과연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생무상이 들었을 때가 죽기에 가장 적합한 때가 아닐까.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고 뜻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더이상 현세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해탈의 경지는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왜 진리인가. 굳이 내가 노력하고 원하는 것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그렇게 까지 알아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살아가며 정답을 얻어야 할 것 같다. 남에게 의견을 구하거나 정답을 갈구하는 것보다 직접 내가 살아보며 인생무상이 과연 최종목표로서 옳은 것인지에 대해 탐구해 나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