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구운몽’을 접했을 때는, 입시를 위해 전문이 아니라 일부분만 접해서 그런지, 내가 영웅 소설이나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몰라도, 약간 유치한 고전 소설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쓴 소설치고, 성진을 통해 김만중의 남성적 욕망이 마구 표출되어 있는 느낌은 아무리 봐도 지울 수가 없다.
구운몽의 가장 큰 특징은 유독 ‘꿈’이라는 장치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양소유의 일생은 성진의 꿈이다. 또, 양소유의 꿈이 양소유의 일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성진의 입장에서 보면 꿈속에서 또 꿈을 꾼 것이 되는 셈이니, 정말 꿈 많이 꾼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쯤이면, 서포 김만중이 ‘꿈’이라는 장치를 택한 배경이 궁금해진다. ‘태몽’처럼 우리 선조들이 꿈을 중시하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가 ‘꿈’을 통해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든 것이 꿈일 수도 있다는 것에서 영화 ‘인셉션(Inception)’과 ‘매트릭스(The Matrix)’가 떠오른다. 인생이란 것이 깨어나면 씻은 듯이 잊힐 꿈일 수 있다니, 허무주의에 빠지는 기분이다. 김만중은 이를 통해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려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성진과 팔선녀들은 꿈에서 깨고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깊이 깨닫고, 육관대사의 아래에서 수행하려 한다. 불교의 시선에서 보면 성진의 꿈은 한 번의 윤회와도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귀영화로 물든 양소유의 삶을 살다온 성진과 양소유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다 온(사실 남편을 나눠 가지고도 다른 부인들과 우애 있게 놀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내 상식에서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혹시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꿈인 것일까?) 팔선녀들이 윤회 후 느끼는 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윤회를 벗어나고자 함은 지극히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김만중이 아마 이런 장치를 통해 부귀영화와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여 귀향 간 아들이 고생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약간의 회의감을 느낀다. 과연 부귀영화로 가득한 인생이 덧없다고 할 수 있는가? 현실이 아닌 꿈과 같은 존재는 현실에 비해 그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있는가? 최근 故 샤이니 종현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부귀영화가 삶의 모든 것이 아닐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그의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기사 댓글에 ‘이런 나도 사는데 왜 네가 죽느냐’라는 식의 글을 보고 누군가는 부귀영화가 간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혼란스럽다. 외적인 가치가 삶에서 가지는 의미란 얼마나 클까? 아마 사람마다 그 비중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쓸모없고, 한순간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가진 자 혹은 가져본 자가 아니던가? 이 소설을 읽고 부귀영화와 생의 덧없음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로 인한 행복에 무뎌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관계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어쩌면 성진과 팔선녀를 비롯해 ‘구운몽’이 주장하고자 하는 주제에 공감하는 이들은 ‘꿈’이라는 장치로 인한 허무주의적 느낌과 돈을 비롯한 외적인 가치의 익숙함에 무뎌져 그 소중함을 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소설을 읽고, 그 소설의 주제에 공감하는 이와 공감하지 못하는 이가 공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구운몽’에 있어서 이 당연한 사실은 나에게 불편한 것이 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