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은 재미있는 꿈속의 소설을 그려놓은 것처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안에 책 한 권을 금방 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구운몽에 나오는 꿈과 같은 이야기가 근거하고 있는 사상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감이 오지 않았다. 이를 깨닫기 위해 구운몽과 관련된 다양한 사상들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구운몽은 불교사상 중에서 금강경의 공사상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운몽의 주인공인 상진은 불도를 닦는 제자인데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과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번뇌 때문에 꿈속에서 양소유로 환생하게 된다. 그리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여덟 명의 선녀와 사랑을 나누며 속세의 삶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서 상진은 꿈에서 깨게 되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삶이 결국 한낱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면서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허망하고 꿈과 같다는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금강경은 현실세계의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라는 주제를 32분에 걸쳐 끊임없이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금강경의 해설서와 구운몽을 대응해보면 금강경의 해설서가 구운몽의 해설서가 될 정도로 이 둘은 사상적으로 끈끈하게 묶여있었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은 이 소설을 쓸 당시 관직에서 내려와 유배를 당한 몸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관직에 앉아있었지만 모든 부귀영화가 사라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공사상을 기본사상으로 전제한 구운몽을 썼다고 추측할 수 있다. 구운몽의 마지막 부분에서 꿈에서 깬 성진은 육관대사에게 감사하다고 말을 건네지만 육관대사는 아직도 성진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꾸짖는다. 성진은 꿈과 현실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었지만, 육관대사는 꿈과 현실의 공간이 똑같으며 무소유가 소유이고 모든 사물의 공허함이야말로 사물의 실체를 나타낸다는 진리를 성진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구운몽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바탕으로 한 금강경을 인용한 부분을 살펴보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이 있다. 이는 '모든 유위의 법은 꿈, 헛것, 물거품과 같고, 현실세계의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와는 조금 다르게 구운몽의 주제를 오로지 모든 부귀영화는 한낱 헛된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성진처럼 도를 닦으며 깨달음을 얻는 삶과 양소유의 삶처럼 아름다운 선녀들을 거느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삶 중 어느 것을 택할지에 대한 주제로 볼 수 도 있다고 생각한다. 성진이 잠에서 깨는 것은 이야기의 극 후반부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양소유가 새로운 선녀를 만나고 그와 어떻게 사랑을 시작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당대 사람들은 구운몽을 읽으며 양소유의 삶을 부러워하고 그처럼 입신양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더 열심히 과거시험을 공부했을 수 있다. 물론 마지막에는 이러한 모든 것이 허망한 꿈이었다고 밝혀지지만, 이는 결말에서만 나온 주제이고 김만중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랑을 얻는 양소유의 이야기를 더욱 집중적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구운몽은 여러 가지 사상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는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사상은 불교의 금강경이지만 구운몽에는 불교사상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적인 부분도 함께 들어가 있다. 양소유가 입신양명을 소망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는 삶을 원하는 부분은 당대의 양반들이 가지고 있던 사회적 이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양소유의 모습 또한 효 사상을 중시하는 유교사상이 밑바탕 되어 있다. 양소유가 팔선녀를 거느리며 일부다처제로 혼인을 하고 선녀들이 자발적으로 일부다처제에 종속되려고 하는 부분 역시 가부장적인 유교의 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여덟 명의 선녀가 똑같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자유로운 삶을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양소유의 첩이 자발적으로 되고 싶다고 하는 부분은 김만중 또한 당대의 유교적 풍속에 스며들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도교적인 부분은 작품 전반에 나타나 있으며 신선사상과 후반부에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허무감 역시 도교의 발상이 밑바탕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동일, {한국 문화 통사 3}(제3판 , 지식 산업사, 199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