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함을 어떻게 해결할까
인생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굳이 세상 모든 쾌락을 다 누려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인생을 다 살아본 끝에 그것이 허무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삶의 과정 중간에 이미 그 단서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운몽』의 성진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삶의 허무를 느끼는 이유는 아무리 많은 행복을 경험해보아도 결국 만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며 맛있는 것을 먹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재밌는 오락이 함께 한다 하더라도, 심지어 가족끼리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항상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을 갖고 산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 번째는 인간의 욕망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이를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번 누렸던 즐거움은 다시 누리더라도 그 효용의 크기가 전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이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보통 일상 속 경험을 통해 누구나 얻을 수 있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다.
이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욕망을 줄이면 된다.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욕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만하는 것이다. 한번 유혹을 참으면 욕망은 조금씩 줄어든다. 오히려 욕구를 풀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탐닉한다면 곧 그 욕망은 더 커져버려 뿌리치기 힘들어진다. 불교의 가르침이 이렇다. 성진이 꿈에서 깨 불가에 귀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창의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고 거기서 기쁨을 찾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창의력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여기서 욕망, 즉 의지를 없애버린다면 창의력 역시 아무 기능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정말 필요한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결핍만 채워진다면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에서 새로운 행복들을 적당히 누리면서 만족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간단한 관점이다. 불교와 달리 기독교가 이러한 관점에 따른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인간에게 목적한 계획이 있었으나, 인간들이 신과의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인간의 허무는 이 결핍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때 해결방법은 물론 신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만족스러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무신론적 실존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의 불만족스러운 심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삶을 살아내라고 종용한다. 이는 인간 허무의 문제가 무엇이건 상관없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운몽』은 학창시절부터 접한 소설이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주인공 혼자 8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또 부인들끼리 화목했다는 가부장적인 설정이나, 부귀영화는 다 덧없다며 인간의 욕망과 인생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내용들이 그랬다. 그럼에도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허무함을 드러내는 대표적 고전 문학으로 자리매김해, 독자로 하여금 인생 전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갖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