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이 덮이는 순간 구가 마침내 증명한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사랑하고 싶어졌고, 내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과 평생 사랑하다 죽고 싶었다. 구와 담처럼, "그때 기억나?" 한 마디 툭 던지면 더 묻지 않아도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편안하게 이어지는 사이. 서로가 서로인 관계, 그렇기 때문에 헤어짐 자체를 서로에 끼워넣을 수 없는 관계. 나와 그런 사이로 살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소설에서 담은 죽은 구를 뜯어먹는다. 비유적인 표현도 아니었고, 어떠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정말 식인한다. 물론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그렇지, 굳이?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길을 들여다보면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구는 사채업자에게 평생을 쫓겼다. 젊은 육체는 수당으로 점쳐졌으며, 버는 족족 빼앗겼다. 없는 사람 취급받으며 평생을 살았으니, 죽어서도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양 흔적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담의 생각이었다. 실신하다시피 울면서 구를 먹는 담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가며, 사랑과 죽음을 생각했다.
단지 식인에 그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담이 구를 먹는 것은. 담은 누구보다 구를 사랑했고, 구는 누구보다 담을 사랑했다. 둘 사이에 벌어지는 그런 행위는 전혀 잔인하다거나, 무작정 그로테스크하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담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따라 죽겠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이런 식의 접근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작가가 '먹는 것'으로부터 전하고자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분명, 좀비 장르에서 인간이 인간을 뜯어 '먹는' 업무와는 같진 않을 거였다. 그만큼 사랑했다는 거다. 너무 사랑했던 그들은 더이상 따로따로의 서로가 아니었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죽어서 만나자 식의 기약 없는 만남을 기약하지 않았고, 그래서 종국에는 '정말로' 하나가 되었다. 작가가 그 행위 자체만을 가지고 진짜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면 뜯어먹어라, 라는 식의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결단코 아닐 것이다. 단지 그 정도까지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썩어 사라지기 전까지는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기에 아름답다. 사랑 역시 죽음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죽음이 육체적인 죽음이든, 만남에 있어서의 죽음(헤어짐)이든, 어쨌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끝이 있다. 제아무리 끈끈하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사랑이라고 한들 죽음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애틋함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 같다. 우리는 매순간 함께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한 줄 알고, 때로는 기다림으로써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다. 사실 사랑 자체는 아주 비이성적인 감정이다. 이렇듯 어차피 끝이 있을 관계에 죽자고 매달리게 되는 것도 그렇고, 서로의 약점을, 알맹이를 전부 다 내어놓는 것도 그렇고, 어떤 짓을 해도 예뻐 보인다는 건... 아주 위험하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생존 본능에 사랑은 꽤 큰 위험요소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우리가 사람이라서고, 그것이 소중하다는 걸 아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있어서고, 그래서 우리는 다른 동물과는 다르다. 구의 증명으로부터 인간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종종 근본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것의 크기가 너무 커서, 내가 일상에서 가지고 있던 고민들은 참 사소해보이게 된다. 가끔 현실에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질 때에는 남의 연애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