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윤리 / 김우창, 박성우 지음 / 글항아리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두 번의 대통령 탄핵심판을 맡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당시 진보측 사람들은 헌정적 관점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대통령 권력의 명운을 좌우해버리는 정치적 결정을 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는 학계, 지식계에서도 광범위하게 제기되었고 저자 또한 그런 시각을 가진다.
입헌민주주의는 두 가지 개념이 조합된 것이다. 헌법과 민주주의. 이 두 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큰 틀에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저자는 이 두 개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한다는 정도로 결론을 이끌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가치에서 어떤 것이 보다 더 우위 가치인가에 대해 파고들어 탐구해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 두 개의 가치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라고 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해서 절대적인 지위는 없다. 사회적 규범, 정치적 규범이라는 것에 도덕적인 절대적 선, 도덕적 진리. 그런 것은 없다. 시대적으로 관계가 부단히 바뀌는데 근대, 현대의 사회적 조건, 사회적 위치, 국민들의 생각에서 봤을 때 두 가치 중에 무엇이 더 우위라고 생각하는가? 저자는 조화되어야한다고 하지만 대체로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보다는 헌법의 가치를 좀 더 우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과연 어느 것이 우위에 있을 때,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 실현에 좀 더 접근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한미FTA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의회비준을 통과했는데 당시 국민들은 그것을 반대했다. 이것을 헌정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으로 볼 수 있는가? 또한 국민들이 중우정의 모습처럼 선동 받고 오해된 정보에서 휩쓸릴 경우에는 어떤가. 두 가지가 극단적으로 배치된 경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의민주주의와 헌정민주주의에서 대표에게 주권을 위임해주는데 대표와 국민들 사이의 의견 차이에서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어느 정도 용인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걸 하나하나 여론과 다르다고 해서 대의민주주의 성립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헌정주의 둘 다 하나의 이념인데 헌법이라는 것은 국가의 기본권, 국민의 기본권, 통치구조를 정의하면서 어떠한 자치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때문에 헌정주의는 그 위에 어떤 옷이든 입힐 수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가치는 민주주의이고 그것을 담고 있는 것이 헌법이며, 헌법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도구라는 측면에서, 법을 도구라고 생각했을 때, 민주주의가 헌정주의보다 앞선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도구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인 가치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가? 예를 들면, 인간이 노동력만이 존재하다가 컴퓨터와 기계 등이 등장했을 때 인간의 노동을 대체했다면.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상황에서 법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도구와 목적이 결코 분리되는 것만은 아니다. 도구 속에도 목적이 있는 것이다.
도구와 목적 간 관계는 결국 헌정주의와 민주주의 중에 어떤 것이 우월한 것이냐로 흐려졌다. 저자도 맥락으로는 헌정주의의 가치를 우선적으로 하지만 결론에는 조화를 강조한다. 그것 보다는 어떤 것이 우월하냐를 치열하게 고민해야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겠지만 법의 지배를 위해 어떤 체제가 그것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최대한 구현해 나가기 위해서 어떤 가치가 가장 중요한지는 생각해본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헌정주의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을 때 법의 지배가 더욱 실현가능하다. 정치와 법치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모델 중 아리스토와 플라톤 모델의 핵심 공통점은 정치와 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정치로부터 법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려했다. 그들의 당시 고대 아테네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기 떄문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한때 황금기를 구가했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낳아 카오스와 무질서로 이끌었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에 문제제기를 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치의 과잉이다. 정치를 할 수 있는, 폴리스의 운명을 논할 수 있는 정신적 덕성이 없는 사람들까지 참여해서 결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보편적 선의 가치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는 사실 이백년도 되지 않은 불안정한 체제이다. 그 전에 민주주의는 위험하고 엄습한 것으로 인식되어졌다. 민주주의는 위험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억눌러야한다는 것이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치열하게 논의했던 연방주의 논설이다. 대표적 사람으로 제임스 메디슨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메디슨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공화정 안의 부작용을 어떻게 걸러내느냐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 메디슨적 민주주의에 담겨있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사유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서구를 지배해오던 사고방식인 것이다
법치의 목적, 메디슨적 민주주의의 법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정치, 다수의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다수정, 귀족정, 전제정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신 인치의 불안정성을 법치를 통해 다스린다. 민주주의 이전에는 법치의 목적성이 다수의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이었다면, 민주주의 이후 법의 지배가 과연 그런 개념인가? 근대민주주의 이후 이러한 개념이 바뀌었다. 법의 지배가 무엇을 규율하는 것으로 바뀌었나? 정치의 과잉,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에 있어서 대표를 규율하기 위해서, 감시하기위해서이다. 대표가 주권자의 의사를 반해 대리인의 역설을, 주권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법의 지배가 이렇게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들만이 부르짖던 ‘헬조선’이란 단어는 이제 전 세대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다. 이러한 풍토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 상부구조의 몰락이라고 생각한다. ‘법치’라는 개념을 잘못 사용할 때, 국민이 고통받고 국가가 고통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