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서평] 군주론
묘사 속에서 재구성된 마키아벨리는, 근엄하고 도덕적인 위정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시정잡배마냥 통속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거리에서 싸우듯 살며, 복권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았던 실패한 정치인. 그것이 남아 있는 기록 속 그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한국으로 치자면 마치 ‘나꼼수’ 속에서 인기를 모았던 정치인이나, ‘트인낭’마냥 거리에서 싸우는 전직 국회의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거기다 그가 자신의 잃어버린 힘을 되찾기 위해 쓴 책인 군주론의 경우, 그 간교함이나 강렬한 책략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금기시될 정도였다. 설상가상 그의 주장들의 근거의 경우 고전들과 비교해도 특별한 차이점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 이래저래 과대평가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 당시 유행했던 골상학에 비춰 여우의 모습에 맞게 재구성된 그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 그의 초상화들이 실제 그의 모습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책 <군주론>이 아직까지도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의미 있는 책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마키아벨리의 책이 현대 현실주의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키아벨리와 그의 책이 단순히 시대를 비추는 반면교사와 같은 것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군주론>은, 냉정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해법들 속에도 세간의 편견보다는 더 ‘온건한’ 방식의 해법들도 같이 제시한다. 시민의 마음을 잃는다면 정부는 결국 무너져내릴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한 ‘후함’의 가장이 ‘검약’을 지키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식의 그의 조언들은, 당시 시대상을 돌아봤을 때 오히려 정론에 가깝다. <군주론>은 그저, 무의미한 위선보다는 실용적인 솔직함을 강조했다. 다만, 그 방향이 조금 남들보다는 더 신랄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군주론>의 시대적 의미는 근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유지된다. 정치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당성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호도하고 자신의 방향으로 이끈다. 명분과 합리와 같은 이유들은 그들 자신의 정치를 정당화하고, 반대편의 이들을 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의 정치가 그들의 목적인 이상, 그들의 집권은 결국 그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적들의 정치적 행위와 별반 차이 나지 않는다. 이상은, 그들에게 현실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그 사실들을 군주국들의 형태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드러냈고, 명분 정치의 한계를 지적했다. 자유를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도시를 완벽하게 파괴하라는 그의 신랄한 조언은, 반대로 비추어보면 군주의 의지와 역량만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의 역진 불가능성을 정확히 짚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어도 <군주론>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집권할 수 있는 신 군주와 그의 신 군주국을 위해 쓰여진 책은, 단순히 책에 쓰여진 내용대로만 놓고 본다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의 책은, 그가 쓴 텍스트를 통해 사회를 다시 비추어보고, 그 껍데기를 걷어내는 수단으로 쓰이는 순간 계속해서 ‘현실적’인 책으로 탈바꿈한다. 말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없다면 지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그런 지도자들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 시민들은 그에 맞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모두 하나의 책에서 나온다. 다소 시니컬한 표정으로 어두컴컴한 술집 어딘가에서 팔짱을 괸 채 째려보는 듯한 마키아벨리의 책은 그렇기에 마치 영화 <와치맨>과 같은 찜찜한 충격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실이 이럴진대,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공격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