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작가의 글 중에서는 단편이 실렸던 책과 장편 소설을 포함하여 3번째로 읽게 된 소설이었다. 이제는 대표작이 되어버린 '82년생 김지영'과 비교해서 한 문장으로 이 소설을 표현하고 싶다. (조금 폭력적일지 모르지만,) 전작이 원펀치로 복부를 쎄게 맞은 것이었다면, '그녀 이름은'이라는 소설은 짧게 뺨을 100대 정도 맞은 느낌이었다. 각 단편은 서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띄우며 시작된다.
'서울에 사는 A씨는 버스 기사이다.'
너무도 다양한 나이대의, 여러가지 직업과 상황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빽빽하게 모아놓았는데, 한 편 한 편, 아프지 않은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 그녀들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모두 이 사회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지워져서는 안되는 우리의 동료들이다. '초딩'이라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는 청소년 혐오에 대하여 설파하는 초등학생 어린이와, 파트너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며,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여 법적인 준비를 하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까지. 이 소설은 '정상성'을 띈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칫 지워버리기 쉬운, 그 중에서도 더욱 가시화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에게도 분명이 '이름'이 있음을 잊지 않고, 상기 시킨 것, 그것이 이 소설의 포인트이다.
소설일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소설이 될 수 있다는는 점이 신기하면서도 아프다. 그래도 '82년생 김지영'을 읽을 때 보다는 내 자신이 단단해진 탓인지, 이 소설이 단편들의 나열인 탓인지, 이야기가 주는 절망감에 먹혀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겪어왔던 일이고, 겪고 있는 일이며, 앞으로 겪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서사가 되어 펼쳐져 있는 걸 보는 것은 아무래도 공포에 가깝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기분으로 조남주 작가의 책을 읽고 있는지 항상 궁금하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나처럼 스스로를 투영해서 읽느라 두려움, 무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장르가 소설인만큼, 허구로 만들어진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소설 속 캐릭터들을 그저 ‘조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을 페미니즘 소설로 만드는 것은 역시 반은 작가의 글이고, 반은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정서의 기저에 있는 자신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 세계'
대학에 와서 책을 많이 읽었고, 어색하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으로 시위에 나가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경험도 했다. 이 기억들이 소중한 이유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마셔버린 음식의 맛을 잊어버리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무언가를 알아버린 이상,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전과는 다른 나로서, 같은 세상을 '다시' 만났다고 표현하면서, 언제간부터 시위에서는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우리의 시대에, 바로 어제같이 가까운 때에 일어났던 일이 이 책에 실려있었다. '엄마, 나 티비에 나왔다.'라고 말할 때의 설레임처럼, 내가 그 흐름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과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 아주 복합적인 마음이 들어서 '다시 만난 세계'라는 단편을 읽을 때에 가장 눈물이 났다.
소설이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들이 그냥 소설이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이 정말 좋은 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일상을 낯낯이 밝혀놓은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읽어도 옛날처럼, 한동안 아무것도 못할 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래도 세상은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면역력이 생겨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남주 작가의 이야기가 이토록 화제가 되는 데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경험이 그저 한 사람의 경험인 것이 아니라, 잔인하리마치 현실 여성들의 경험을 대표하는, '보편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읽고, 우리에게 그런 때가 있었냐며, 그저 소설로 치부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