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물려받은 갈탄광을 조르바라는 노인과 개발하면서 이루어지는 교류를 주된 이야기로 다룬다. 주인공인 ‘나’는 조르바에 비하면 젊은 청년이지만 책과 글을 가까이하는 정신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이와 반대로 정신적이고 금욕적인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 결혼, 독립전쟁, 범죄 등 산전 수전을 다 겪은 조르바는 오로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사실 이 소설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직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책과 글을 가까이한 민족주의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라는 실존 인물을 만나게되어 인생의 변환점을 만나게 되었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소설의 배경을 접하기도 전에 주인공 ‘나’의 모습이 스스로와 닮아 있음을 느꼈다. 항상 이것저것 계산해보고 생각하면서 글만 읽어대는 나의 모습이 그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조르바의 행동과 말들이 내 가슴에 감동적으로,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나’와 사랑을 나누었던 과부가 교회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과부와 사랑을 나눈 사이이다. 하지만 과부는 자신을 사랑하던 마을 청년이 실연당하고 자살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나서지 못한다.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일임을 알았지만 글 밖에 모르고 용기도 행동력도 없는 주인공은 구경만 할 뿐이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했다. 내가 그였다면 용감하게 나서서 마을 사람들의 광기를 막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나도 망설이면서 구경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 상황 속에서 홀로 용감하게 나선다. 마을 사람들이그녀를 죽이라고 소리치면서 둘러싸고, 흥분한 남자들이 칼을 들고 설치는 한중간에 맨손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고 과부에 대한 괴롭힘을 멈추라고 외친다. 조르바는 자신의 귀가 물어 뜯겨 나가도 과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역부족으로 과부는 살해당하지만 조르바의 용기는 위대한 것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 시끄럽게 따져도 옳음을 행할 의지와 결단력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가? 탄광에서 모두가 파묻혀 죽을 위기에서 홀로 용감하게 지지대를 잡고, 자신과 상관도 없는 약자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그의 행동은 ‘나’와 대비를 이루며 내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광산 개발은 무참하게 실패로 끝난다. 하지만 조르바의 모습을 닮아버린 ‘나’는 책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조르바와 함께 남은 양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신나게 춤을 춘다. 그 장면을 읽는 순간 나도 조르바의 모습을 닮고 있음을 느꼈다.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만난 뒤 인생의 변환점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썼다. 외부적으로 광산개발에는 참패했지만, 비겁한 책상물림의 모습에서 벗어났고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만나게 된 것이고 진정한 ‘그리스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독특한 해석과 자유에 대한 추구로 인해 그리스 정교회의 미움을 샀다. 그는 파문 당했고 시신은 아테네에서 안치될 수 없었다. 결국 고향인 크레타에 묻히게 된 그는 이러한 끝을 예견한듯이 미리 묘비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으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