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회적 자아가 형성된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준비된 이미지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가 표면 영역(일상생활)에서 행동할 때는 사회적으로 권력화된 이미지(예를 들면 외모나 물질)가 영향을 끼친다. 권력화된 이미지를 극대화하면 준비된 이미지의 여러 가지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필요조건은 무수히 많다.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고, 모든 필요조건을 성취할 수 없다. 과연 외모나 물질 같은 사회적으로 상위 권력에 있는 조건으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극대화된 권력화만 남은 이미지는 우리의 정신적 여유를 강탈한다. 우리는 사회적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철학을 이미지에 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 철학이 담긴 이미지를 가질 때, 우리는 더 다채롭고 깊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왜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하는 걸까?
철학과 천연염색
우리는 철학과 이미지의 상관관계를 천연염색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지에 철학 담기는 만약 염색해야 할 옷에 염색물을 한 번에 부어버리는 행위다. 염색물을 한 번에 부으면 옷의 색깔이 원하는 대로 나오겠는가? 이미지에 조악하게 철학을 담아봤자 제대로 본인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 건 자명하지 않을까? 물론 염색물은 따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철학을 천천히 이미지에 주입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깊은 고민만이 준비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다. 이미지를 부분으로 쪼개진 철학에 담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철학을 이미지에 담는 방식으로는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없다. 설령 준비되었다고 해도 나중에 하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 본인의 얕게 포장된 철학이 드러나게 된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읽은 사람이 칸트의 철학을 현실에 대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지를 철학에 담가야 한다. 천연염색의 첫 번째 과정은 염료에서 염색물 뽑아내기다. 염색물을 만드는 과정은 무척 고되다. 말리기, 추출하기 등 여러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얻은 염색물에 옷감을 담갔다가 말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작업을 반복할수록 다채롭고, 더 진한 색깔을 낼 수 있다. 깊은 철학 구성하기도 마찬가지다. 염료에서 뽑아낸 염색물의 역할은 경험이 담당한다. 경험을 성찰할수록 깨달음과 철학은 깊어진다. 깨달음을 자아와 연결할수록 철학의 색깔이 예뻐진다. 하지만 같은 색깔로 작업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생산하는 색깔은 천차만별이다. 우리가 이미지를 철학에 푹 넣고 이상향을 따라간다고 해도 결국 자신에게 맞는 이미지가 나오게 된다. 이미지가 만들어 낸 결과가 깊은 철학의 물을 증명한다. 다양한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분명 재밌으면서 진지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때에 맞게 이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철학의 깊이가 깊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혹자는 "철학을 이미지에 담는 것이나 이미지를 철학에 담는 것이나 차이가 없지 않으냐."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미지가 먼저든 철학이 먼저든 준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된 이미지는 정도의 차이를 가진다. 사람은 결핍의 존재라서 완벽히 준비된 이미지를 만들 수 없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철학에 이미지를 담아야 한다. 철학을 이미지에 담을 때는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부족하다. 오로지 이미지 형성을 위해 철학을 만드는 것에 열을 쏟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에 이미지를 담을 때는 철학부터 생각하게 된다. 깊고 얕음이 시작점부터 갈린다.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정체성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회적 자아가 형성된다.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준비된 이미지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가 표면 영역(일상생활)에서 행동할 때는 사회적으로 권력화된 이미지(예를 들면 외모나 물질)가 영향을 끼친다. 권력화된 이미지를 극대화하면 준비된 이미지의 여러 가지 필요조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필요조건은 무수히 많다.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고, 모든 필요조건을 성취할 수 없다. 과연 외모나 물질 같은 사회적으로 상위 권력에 있는 조건으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극대화된 권력화만 남은 이미지는 우리의 정신적 여유를 강탈한다. 우리는 사회적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철학을 이미지에 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한다. 철학이 담긴 이미지를 가질 때, 우리는 더 다채롭고 깊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왜 이미지를 철학에 담아야 하는 걸까?
그놈의 현실적
“그 일은 현실적이지 않아서 못할 것 같아.” 흔히 하는 말이다. 많은 조건들 가운데 특히 '현실적'인 범위 규정은 이미지의 준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물론 피부로 느끼는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제가 되는 조건들이 ‘현실적’의 범위를 규정해주진 않는다. 다시 말해, '현실적'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인간은 '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조건들을 뒤섞어서 '현실적'의 범위를 규정한다. 그런데 그 조건들을 과대평가해서 철학의 깊이와 가능성의 범위를 낮게 측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만약 이미지를 철학에 반복적으로 담는다면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현실적'의 범위는 자존감과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에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콘텐츠가 있다. 이 콘텐츠는 직접 전달하기 어렵거나 논란거리가 될 만한 내용들을 익명으로 페이지에 풀어내는 역할을 한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도 이 콘텐츠가 있는데, 한 글이 논란이 되었다. 한 학생이 최근 전교회장 선거가 이루어진 과정을 보며 아쉬웠던 점을 적었다.
“전교 회장단들이 내건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지키지 못했다면, 애초에 현실적인 요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면 그 공약을 내건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실천 가능한 공약들만 거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한다.” 보는 순간 가슴이 아픈 글은 오랜만이었다. 전교회장단 시절 공약을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들과 성취했던 변화가 공약의 성공률, 결과론으로 깨졌기 때문이다.
전교 부회장 선거 당시 조금 무리한 공약도 내걸긴 했다. 공약으로 후보자의 신뢰성과 인맥만으로 잡을 수 없는 층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이미지 포장으로 유권자들의 표를 잡아야겠다.’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금 무리한 공약을 어떻게든 실현하고자 했다. 한계치를 높여 ‘현실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고, 학내에 문제의식을 심어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조금 무리한 공약 작전은 성공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 했던 내용(생활복, 와이파이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생이 쓴 글은 '결과를 성취하지 못했다면 공약은 실패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일을 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요건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에 묻히면 할 수 있는 폭은 상당히 줄어든다. 만약 학생의 주장대로 실천 가능한 공약들만 건다면, 고등학교 수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실천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놔둬버리면,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까?
영락제의 북경 천도 사건으로 '현실적'인 범위의 끝을 생각해보자. 당시 북경 지역은 황무지도 상당히 많았고 사는 주민도 얼마 없었던 척박한 곳이었다. 더불어 명나라가 건립된 지 오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국가의 힘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영락제는 북경 천도를 계획하여 성공했다. 하지만 북경 천도의 동기에는 대의명분보다는 영락제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동아 공동체를 다시 구성하기 위해 북경을 대 몽고 작전기지의 근거지로 삼은 이유도 있지만, 홍무제의 봉건 정책 시절 영락제가 다스렸던 북평(현재 북경)으로 다시 회귀하려는 마음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그는 경제의 최선진 지역이었던 당시 수도인 남경의 이점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자금성 축조와 천도 계획을 밀고 나갔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불가능한 계획이지 않을까? 과연 영락제는 계획 성공의 현실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엄청난 계획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할 확률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을 약 이십 년간 끌고 나갈 수 있었을까? 회귀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일을 시작했다면 분명 고꾸라졌을 것이다. 그도 철학이 있었기에 제대로 된 추진을 하지 않았을까? '현실적'의 한계선도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현실적’이란 단어는 자신이 규정짓기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규정짓기의 범위는 자신이 어떻게 이미지를 철학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돌아봐
꾸준한 자아 성찰은 철학의 색깔이 예뻐지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 공허에서 자아를 돌아볼 공간을 많이 잃었다. 생각할 공간을 어떻게 다시 채울 수 있을까? 우리에겐 '계기'가 필요하다. 계기는 '나 밖'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철학 수업의 가르침이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일이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께서는 자주 다퉜고,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이런 상황일수록 더 올바르고,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말했다. 혼자 가정을 이끌어가면서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는 엄마를 보면서 예의를 갖추고 쉽게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면서 나는 겉으로 드러내기 좋아하고, 쉽게 자만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된 계기는 한 선생님의 난데없는 꾸중이었다. 교무실에서 슬리퍼를 끌어 소리를 냈다는 이유였는데 처음엔 황당했다. ‘슬리퍼 정도 끌었다고 이렇게 심하게 혼이 나는 것은 좀 부당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고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선생님이 지적한 것은 단순히 슬리퍼 끄는 소리가 아니라 학생으로서 보여드린 잘못된 태도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항상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나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고, 친구들과의 관계, 명예에 자만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우월감은 아주 오만한 생각이었다. 진짜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나와 비교하여 평가하려는 버릇부터 고치려고 했다. 발걸음 소리를 줄이며 인사를 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며 겸손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여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런 노력을 하기 시작하니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장점이 보였다.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니 오히려 더 당당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엄마가 가르치려고 했던 ‘당당함’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당당함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에게 당당하라'라는 뜻이었다. '기본을 갖춘 사람'과 '자격을 갖추자'라는 철학이 생겼다. 슬리퍼는 사소한 계기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나'의 과거를 되짚는 성찰이 단단한 '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매일같이 나를 돌아보지 않는가에 대한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도 아직 이미지를 제대로 철학에 담지 못한 것일까? 생각하는 자체가 어쩌면 이미 나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 이미지와 철학 사이에 괴리는 없는가?
이 글은 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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