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심장하게도 나는 이 책을 스웨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다. 이미 스웨덴 시차에 적응한 몸이어서 다른 승객들이 잘 때에도 혼자 램프를 켜두고 흡입하듯 읽었다. 6개월 간 있었던 스웨덴은 생활 속 작은 한 부분에서까지도 민주주의가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곳에선 정부가 국가 구성원들을 향해 임의로 긋는 선 따위는 볼 수 없었고,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녔다. 시민들 역시 정부에 믿음을 가지고 나와 남의 권리를 같은 선상에서 볼 줄 알았다. 어느 곳이든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그들을 위해 비장애인 시민들은 자신의 시간을 내줄줄 알았다. 화장실은 남녀의 구분이 없었으며 LGBT라고 해서 숨기거나 꺼려하는 사람도 없었다. 왠만한 식당에는 베지테리언 음식이 반드시 있고 친구들은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했다. 아파트에서 입주민을 상대로 방세를 올리자 사람들은 협상 회의단 같은 것을 조직했다. 나와 함께 사는 친구들은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식사 시간이나 피카(fika;
스웨덴식 티타임) 때 함께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지금 내가 가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2017년 6월 집계한 청년실업률은 10.6%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통계청, 2017) 고액의 교육비를 지불해 상위층 대학을 졸업해도 청년들은 백수나 비정규직을 면치 못한다. 고령층 빈곤율 또한 2014년 기준 48.8%로 OECD 최저치에 머무르고 있다.
(OECD, 2014) 노인의 절반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속한다는 소리다. 반면 고위 공직자와 대기업은 높은 수익에도 모자라 각종 비리와 탈세 의혹이 매일 불거져 나온다. 우리 국민 57%이 정치인을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집단으로 꼽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아시아경제, 2017)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겨우 연명하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가 아예 멸종된 것은 아니다. 기득권의 횡포가 도를 넘을 때면 우리 국민들은 촛불과 깃발을 들고 거리로, 국회로 나아가 저항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승리를 쟁취했다. 4.19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몰아냈으며 6월 민주항쟁은 수십 년간의 독재 정권을 종식했다. 작년 겨울의 촛불은 국정농단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불통 정부의 기나긴 추위를 녹이는데 쓰였다. 그러나 이렇게 참을만큼 참다가 이따금 터지는 게 민주주의인가. 왜 국민들은 황금같은 주말을 버리고 광화문에 나와야만 했나. 책의 저자들은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가 '껍데기 민주주의'임을 비판한다. 정당정치, 자본주의, 개발과 폭력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겉만 번지르르할뿐 속은 썩고 있다는 것이다.
하승수는 우선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짚어본다. 민주주의의 어원인 데모스(demos)는 아테네의 '지역'을 뜻하는 말이었다. 각자 다른 지역들이 동등하게 의사소통에 참여해 사회를 이뤄나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대학도, 문화예술도 수도권 중심인 우리나라와는 시작부터 맞지 않다. 저자들은 각 지역, 더 작게는 마을 단위로 주민들이 직접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를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들이 나서서 자신들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탈피하고 지역이나 사회적 소수자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한편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시장 자유가 몰고오는 양극화는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를 흐트러놓는다. 그러나 친자본주의에 단단히 뿌리내린 우리의 시장 구조를 볼 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론상의 '반자본주의'가 최고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저자들은 각자 내린 자본주의의 정의에 따라 여러 '탈자본주의' 방법을 제시한다. 하승수는 자본주의가 토지, 돈, 노동력의 상품화로 이뤄진다고 말한다. 그의 탈자본주의 해법은 상품화된 것들에 대한 공유화에 있다. 즉 토지 사유화를 제한하고, 역이자화페나 지역화폐로 이자 수익을 내지 않고, 기본소득제로 노동력 상품화를 줄이자는 것이다. 한편 하승우는 자본주의를 생산/유통/소비/폐기의 단계를 단절시키는 주범으로 본다. 이로 인해 거래 간 불균형이 이뤄지고 생태계가 파괴된다. 그는 협동조합 또는 녹색운동 등을 통해 상품의 순환시스템을 복원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결책은 물론 기존의 틀을 바꾸는 것을 꺼리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산다. 가령 돈의 사유화를 막자는 하승수의 제안은 수많은 부실은행과 신용불량자를 만들 것 같다. 그러나 스웨덴의 '야크은행'은 신뢰도 부실율 0.12%의 무이자대출을 실제로 운영하고 있다. 이자 대신 저축포인트로 운영되는 무이자대출은 서민의 이자 부담을 줄이고 이들을 지원해야할 정부 예산도 아낀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과감한 개혁에 대한 고민이 사회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얼마 전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을 올렸다. 재벌개혁을 통한 경제민주화, 검찰 개혁, 개헌 등을 이루겠다는 그의 정책에는 기존 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추진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기대하기엔 이르다. 제도를 바꾸는 정치공방이 아무리 거세어도 겨울을 지폈던 촛불이 사그라들면 그만이다. 시민들은 더 모습을 드러내야한다. 결국 이 책의 저자들도 녹색당 당원. 우리는 이런 글을 더 읽고 우리의 목소리로 더 많이 말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