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사람은 정말 스물다섯 뿐인가
『나, 조선소 노동자』는 2017년 5월 1일 발생한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로 인한 정신적 외상을 겪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그 날의 진실을 전하려는 책이다. 책을 읽기 전 내가 조선업에 대해 알고있는 사실은 두 가지 뿐이었다. 첫째, 국내 조선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을 자랑하며 울산과 전남지역에 특히 밀집하여 산업 규모가 막대하다. 이는 고등학생 시절 한국 지리를 공부하며 표와 그래프로 접한 것으로, 경제적 측면에 국한된 지식이다. 둘째, 조선소 노동자 중 막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가 많다. 이는 조선소가 밀집한 울산의 성당에 수녀로 계시는 고모께서 해주신 이야기이다. 성당에 찾아오는 조선업 종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조선업에 대해 막연히 ‘힘들지만 수입이 많은 직업’이라 생각할 뿐, 나와는 먼 이야기로 대했다.
강의 중 교수님께서 우리와 먼 대상들에 대한 기록인 네 권 의 책을 설명해주셨을 때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 반의 나에게 가장 낯선 이야기라 생각하여 『나, 조선소 노동자』를 골랐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역시 조선소 내 노동과 그 문제점, 해결방안을 명확히 떠올리기 힘들다. 그러나, 이것이 곧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건 발생 당시 뉴스에서 스치듯 접한 크레인 참사가 얼마나 많은 이들 에게 재해로 다가왔는지, 또 내가 알던 조선업의 수익과 성장 지표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화자와 그들의 이야기 속 인물에 공감하게 된 것은 이 책이 갖춘 구술기록집 형식 때문이다. 단순히 참사와 후속 처리에 대한 도표와 그래프, 그리고 분석적 글로 삼성중 공업 크레인 참사를 접했다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었기에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개선되어야 한다 생각했던 부분들은 바뀌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계속 등장하는 와중에 마땅한 해결방안이 떠오 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홉 개의 증언 모두 기억에 오래 남았 으나,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챕터는 「꿈을 꾸기엔 너무 늦 었지」와 「이 배가 나가려면 얼마 안 남았다 이거예요」였다.
「꿈을 꾸기엔 너무 늦었지」의 화자 이정은씨는 아홉 명의 화자 중 유일한 여성 노동자이다. 그가 경험한 조선소는 사무 실이나 학교 등 나에게 익숙한 공간보다도 훨씬 여성차별적이다. 열정과 능력을 모두 갖춰 쉬지 않고 일하는 그는 여성이기에 반장이 될 수 없고 본사 직원에게 더 많은 ‘지랄’을 당한다. 선배 여성 근로자인 ‘사부’와 고군분투하며 일하던 그가 참사 이후 재취업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 다른 증언자들과 대비된다. 물론 남성이라 하여 여타 증언자들의 트라우마와 어려움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되겠지만, 철강업 내 여성이자 산재 피해자라는 두 정체성이 교차하는 이정은씨에게는 복합적인 이해와 치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 배가 나가려면 얼마 안 남았다 이거예요」에서 내가 주목한 인물은 참사에 대해 증언하는 김재영씨 그 자체보다는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집사람’이다. 참사 이후 일상 생활마저 어려워하는 피해자의 가족 역시 참사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산재로 인해 단절된 수입에 더불어 피해자를 가장 가까이서 보며 재활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김재영씨가 말하는 유독 심했던 부부싸움은 정말로 폭력이 아닌 싸움이었을까? ‘애가 옆에 있든 없든 간에 때려 부수고, 집사람이 경찰에 신고 한’ 사건 후에 김재영씨의 가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허나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의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조치 역시 필요하다 생각하다. 실업 상태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을 당하다 정신과 치료를 길게 받은 경험이 필연적으로 떠올랐다. 산재 피해자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아무리 그 주체가 피해자라 하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책을 읽고 난 뒤 증언 이외 자료 역시 궁금해져 조사를 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전국적 분향소도 집회도 없이 지나갔던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의 폐단이 치유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재보험과 산업현장에도 명시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다. 여전히 산재보험이 인정하는 구제의 대상은 정신적 외상을 겪는 당사자들마저 완벽히 포용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상해를 입은 피해자가 아니라면 산재피해를 신청하는 것마저 어렵다.
책의 「들어가는 글」은 “이날 다친 사람이 정말 ’스물다섯‘ 명뿐인가” 질문한다. 허나 이 질문의 답이 산재의 피해자를 사망자와 부상자, 그리고 목격자로 끝나서는 안 된다. 기업 측의 적극적 보상과 이후 유사한 재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더불어, 산업 상 재해를 그 자리에서 겪은 노동자가 아닌 간접 피해자 대한 지원 역시 필요할 것이다.
최근 읽은 소설 『피프티 피플』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들은 유가족들이 만든 것이라 한다. 산재보험을 개선하고 안전하며 정당한 노동 환경을 만드는 것 역시 이를 경험한 당사자들에게서 시작될 지 모른다. 허나 그러한 노력이 당사자들만의 일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 의 관심 하에 기업과 정부에 의한 조치가 만들어져 이미 일어 난 산재와 일어날지 모르는 산재의 피해자를 치유했으면 한 다.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쓰인 이 책이 그러한 치유의 끝이 아 닌 시작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