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이 글을 쓰는 지금, 한국은 리더십의 부재로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으로 리더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컨트롤타워가 제 기능을 상실하자 비상사태에 기민하고 신속히 대처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리스크’라고도 불릴 만큼 대외적으로 중요한 변수인 미 대통령 당선인과의 대화 창구도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대내적으로는 조류 인플루엔자 질병을 미온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광범위하게 질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위기이고, 미래의 운명을 결정할 기로에 서 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는 이보다 심각한 수준의 위기가 닥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은 당장 나라가 무너지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나라의 명운은 전장의 한 장수에게 달려 있었다. 등 뒤에는 리더십 없는 무능한 임금과 음해, 역모가 가득한 조정이 있었고, 눈앞에는 초라한 무기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강력한 외적을 상대해야 했던 장수였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이 장군은 12척의 배로 왜선 130여 척을 격퇴한 명량해전의 지휘관이었고, 세계 4대 해전이라고 불리는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데 성공하고, 끝내는 조선을 외침으로부터 구해낸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리더로 손꼽히는 이순신 장군이다.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그가 이뤄낸 전장에서의 업적과 그의 냉철하고 강인한 능력에 주목해 왔다. 그렇지만 나는 난중일기를 읽으며 영웅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 뒤에 감춰져 있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난중일기 속 이순신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늘어가는 흰 머리를 보고 가슴 아파하는 아들이자, 전쟁터에서 셋째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아버지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건넬 줄 아는 리더였다. 부족한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병사에게 특별휴가를 내주고, 지급된 보급품이 부족해 겨울 옷이 없던 12명의 병사에게 자신의 옷을 건네줄 만큼 그는 휘하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냉철하고 차가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영웅이라는 이미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었다.
그의 인간미를 보면 볼수록, 결국 한 명의 나약한 사람이었던 그가 어떻게 국가의 명운이라는 가혹한 책임을 이겨냈을까 싶다. 외적은 강력하고 가진 병력은 턱없이 약하고 모자랐다. 없는 살림에 최선을 다해서 싸웠음에도 선조에게 치하받기는커녕 파직당하고, 사형의 위기를 넘기고, 백의종군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고초 끝에 돌아와 보니, 없는 살림에 고생하며 구성한 병력은 후임자에 의해 공중분해 된 상태였다. 판옥선 12척에 불과한 남은 전력으로 130여 척의 왜선을 상대해야 하는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국가이지만, 자신의 손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영웅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박했지만, 이순신은 그 상황에서조차 국가에 충성을 다했고 왜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일기에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과 감정을 늘어놓지 않았기에 그 고뇌와 아픔이 더 공감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어 5만여명의 병사와 백성이 몰살당하고 진도와 광양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절망감을 두 문장으로 담아냈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노라니 온갖 근심이 차오른다.”
난중일기에는 역사적 사실이 정확하게 쓰여 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감정을 구구절절 쓰는 것을 꺼렸다. 그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난중일기 전체적으로 굉장히 많이 쓰인 표현은 ‘홀로 독(獨)’ 과 ‘한탄한들 무엇하랴’ 였다. 국가의 명운을 등에 인 책임은 누가 덜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정의 모함으로 누명을 쓴 것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었을까. 본인이 느꼈을 여러 감정들을 ‘홀로’, ‘한탄한들 무엇하랴’ 라는 두 마디로 함축해 표현했다. 오히려 ‘한탄한들 무엇하랴’ 라는 표현에서는 무덤덤하게 앞으로 직면할 일들을 준비하고자 하는 의지가 두드러졌다. 속상하고 힘들어도 이미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기보단, 다가올 일에 집중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만큼은 정말 굳건했다.
한국이 리더십 부재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런데, 사람을 끌어모으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한국에 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리더십의 부재를 느끼는 이유는, 강한 통솔력과 위기대처능력을 가진 사람은 있어도 일반 시민들의 아픔을, 현실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리더가 아직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순신이 보여주었던 출중한 능력만큼이나 빛났던 그의 공감능력. 진심으로 사람을 위하고 주변인을 아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험난한 세상 속에서 믿을 수 있는 리더로 대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