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부와 내부의 교차점에서 본 영국
이번 주 독서토론 책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이다. 개인적으로 일본 도서를 별로 안 좋아해서 걱정했는데, 주인공 이름이 스티븐스여서 의아했다. 알고보니 작가가 영국에서 자랐다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책으로 1989년 부커상을 수상했으며,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굉장히 독특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데, '영국에서 자란 일본인 작가'가 쓴 '영국인에 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영국 내에서 외부인이지만, 동시에 영국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영국문화를 잘 아는 내부인이기도 하다. 영국의 외부인이자 내부인인 작가가 영국인을 묘사하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롭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장황한 문체와 조금도 웃기지 않은 블랙코미디를 쓰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었는데, 스티븐스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장황한 문체가 영국 특유의 화법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이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의 어법이 일본인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한 것 같다', '~이 아니라고 보긴 어렵다' 등의 표현은 일본식이다. 특히 법조문에서 이 같은 문체가 두드러지는데, 방어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과 영국 모두 섬나라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일본과 서양의 영국을 비슷한 포지션으로 본다. 섬 나라 특유의 폐쇄적 성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문체에 관한 여러가지 의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영국인 특유의 화법일 수도 있고, 일본인의 문체일 수도 있으며, 스티븐스의 결벽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굳이 구분하려 하기보다는 하나의 맥락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작가는 영국의 문화가 익숙한 일본인이며, 스티븐스 역시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전형적인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들이 어우러질 때, 이 작품을 조금 더 잘 느낄 수 있다.
2. 품위란 무엇인가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살면서 '품위'라는 단어를 이토록 많이 들었던 적이 있는가"였다. 품위가 도대체 뭐길래, 스티븐스는 그토록 품위를 부르짖는 것인가? 스티븐스가, 작가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품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남아 있는 나날'에는 여러가지 의미의 품위가 등장한다. 스티븐스가 지키고자 하는 집사로서의 품위, 그가 동경하는 신사로서의 품위, 그리고 그가 끝내 자각하지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품위.
1. 집사로서의 품위
먼저 '집사로서의 품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스티븐스는 거대한 달링턴 홀을 운영하는 집사라는 데에 큰 자부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그는 집사로서의 품위를 지켰던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며, 그처럼 살길 바란다. 극 중 스티븐스는 '전문가적 실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은 집사 직위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키고, 집사로서의 삶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헤이스 소사이어티'이다. '오직 일류급' 집사들만 인정하는 이 단체는 회원수를 극히 제한하는 것은 물론, 대부분의 사안들이 극비로 취급되었다. 그중 소사이어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는 '자체 회원 기준'이었다. 소사이어티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길 꺼렸는데, 후에 이렇게 발표한다.
기준을 밝히라는 압력이 꾸준히 높아진 탓에, 또 계간지 <젠틀맨스 젠틀맨>에 실린 일련의 편지들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소사이어티'는 자신들의 단체에 가입하려는 지원자에게 저명한 가문에 소속된 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인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_본문 44쪽
"가장 핵심적인 기준은, 지원자가 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방면에서 제아무리 수준 높은 성과를 거두었더라도 이 측면에서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지원자는 결코 우리의 회원 요건에 부합되지 못할 것이다." _본문 45쪽
'저명한 가문'의 기준이 뭘까? '지위에 상응하는 품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소사이어티의 기준이 굉장히 모호하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스티븐스는 달랐다. 그는 소사이어티의 기준에 매우 공감했다. 그레이엄은 품위가 여성의 아름다움처럼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스티븐스는 품위를 정의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노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말하는 '품위'란 것은 이 업에 몸담고 있는 한 끊임없이 의미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갖춘 마셜 씨 같은 저 '위대한' 집사들도 오랜 세월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꼼꼼하게 경험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얻어 냈으리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레이엄 씨와 같은 태도를 택하는 것은 직업적 사명감의 견지에서 볼 때 패배주의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_본문 46쪽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기 마련이다. (중략)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_본문 57~58쪽
위대함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전혀 무익한 시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는 척 보면 안다.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레이엄 씨의 논법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이 문제에서 그와 같은 패배주의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믿는다.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직업인으로서의 의무이며, 또 그렇게 해야만 스스로 '품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우리 각자의 노력에도 발전이 있을 것이다. _본문 59~60쪽
스티븐스가 생각하는 품위란 일종의 직업의식이라고 본다. 전문가로서의 책임감, 의무,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단순한 직업의식이라고 치부하기엔, 스티븐스의 삶은 너무 편향되어있다. 스티븐스는 품위를 가진 자만이 위대함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극한에 이르는 노력을 하는 사람만이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입지를 가진, 위대한 스페셜리스트를 꿈꾸었나보다.
2. 신사로서의 품위
책은 스티븐스 1인칭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책에서 묘사하는 '신사' 또한 스티븐스가 생각하는 신사의 이미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신사'에 대한 스티븐스의 생각은 어딘가 겸연쩍다. 먼저, 그는 신사로서 달링턴경을 흠모하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보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 순간에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집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세상의 저 위대한 중심축에 거의 도달했다는 것을. 그 때 거기에서 서서 그날 저녁의 사건들, 즉 그 시간까지 있었던 일들,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되씹어 보자니, 내가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의 요약 판인 양 느껴졌다. 그날 밤 나를 고무시켰던 그 승리감을 나로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_본문 282쪽.
그러나 그 감정에 뿌듯함만 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달링턴경의 명예가 불미스러운 일로 얼룩지자, 스티븐스는 자신은 집사로서의 책임을 다했을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달링턴경의 명예를 자신의 것처럼 자랑스러워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태도이다.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바로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등급'이라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 없다. 오늘날 나라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_본문 251~252쪽.
한편, 스티븐스는 여행을 하면서 종종 신사로 오해받지만, 그 오해를 굳이 풀지 않는다. 물론 '어차피 하루 보고 말 사람들, 굳이 일일이 설명하느니 적당히 대해주고 넘어가자' 라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신사'를 경외했다면, 이를 사칭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마을 사람들이 신사에 대해 잘 알았어도 그처럼 행동했을까? 스티븐스의 행동은 이중적이다. 신사가 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선택받은 소수의 집단에 속하고 싶다는 부러움, (위대한 신사를 보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과 다르다는 상대적 우월감이 뒤섞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작품 내내 스티븐스는 '위대한 신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위대한 신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사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읽는 내내 궁금했다. '위대한 신사'가 도대체 뭘까? 그 전에 '신사'는 어떤 사람일까? 신사가 되기 위한 '품위'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 내가 영국인이 아니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신사 문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웠다. 그 '신사'가 귀족이라는 계층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인 것 같아 더 재미없었다. 마치 스티븐스의 블랙 코미디 유머처럼.
3. 인간으로서의 품위
작품 후반부에서 해리 스미스는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해 역설한다.
이때 해리 스미스 씨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존중하기는 합니다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품위는 단지 신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품위란 이 나라의 남녀 누구나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후략)" _본문 229~230쪽.
" … 제가 이 자리에서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노예 상태에서는 결코 품위를 갖출수 없습니다. 우리가 싸운 이유도 그거고 우리가 마침내 얻은 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자유 시민으로 살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분이 무엇이냐, 부자냐 가난뱅이냐를 떠나서, 영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일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엔 앉혔다 빼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_본문 230쪽.
현대에 와서 해리 스미스의 말을 살펴보면, 따질 것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칼라일 박사의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소박한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을 살펴보면, 스티븐스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음에도 그의 견해가 거의 들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스티븐스의 '정치적 무관심'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달링턴홀에서 세계를 뒤흔들 '비밀회동'이 수시로 열리지만 스티븐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아들 카디널이 그에게 직접 경고를 해도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런 상황들은 집사라는 직업에 대한 고양의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한 그의 성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이는 스티븐스가 가진 '계급적 딜레마'를 뜻하기도 한다. 신사로서의 품위, 집사로서의 품위를 중시하지만, 정작 인간으로서 모두가 가져야할 보편적 품위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들리는 숙소마다 급을 나누고, 사람들의 복식을 따지며 평가한다. 이는 '급'에 따라 사람을 나누는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스티븐스 역시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3. 스티븐스가 삶에서 놓친 것
스티븐스의 삶을 요즘 세대의 말로 표현하자면, '워커홀릭' 내지는 '워라밸이 붕괴된 삶'일 것이다. 그는 집사로서의 품위를 위해, 달링턴 경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전부 썼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선망하고 존경하던 달링턴 경은 잘못된 선택으로 명예가 추락하게 되고, 스티븐스의 삶 역시 불명예로 얼룩진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며, 달링턴 경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 선을 그으려 한다. 하지만 평생 달링턴 경을 흠모하고 살아온 그가 달링턴 경을 외면했다는 사실 자체가 집사로서의 스티븐스의 삶이 불명예스럽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예수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저버렸듯이 말이다.
황혼녘에서 스티븐스는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며 자조한다. 언뜻보면 자신의 삶과 선택을 후회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토의원들에게 질문했다. "스티븐스는 행복했을까?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웠을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티븐스가 행복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집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달링턴경을 보좌함으로써 세계라는 바퀴의 축이 돌아가는데 일조한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스는 직업적 성취를 높이 사는 부류이므로, 삶에 대한 만족도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왜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을 후회한 것일까?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시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었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 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_본문 299쪽.
스티븐스는 '집사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인간 스티븐스의 삶을 사는 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알아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삶은 달링턴 경에게 달려 있었고, 결국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그간의 삶이 안타깝게 마무리되었다. 그는 나치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비밀회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는 집사로서의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달링턴 경은 자신이 판단하고 행동했으며, 그에 대한 댓가를 치뤘다. 하지만 스티븐스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타인에게 넘긴 댓가로, 타인의 죄를 함께 나누어 들어야 했다. 아무것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건 달링턴 경의 잘못일까, 스티븐스의 잘못일까?
나는 오랜 시간 고민했다. 스티븐스가 삶에서 놓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삶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그의 삶은 달링턴경이 주인공이었다. 당연하지만, 타인이 주인공인 삶이 결과적으로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크고 작은 성취감을 누릴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와의 추억, 이성과의 사랑, 동료와의 의리를 지킬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집사로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으로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삶의 방식을 답습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자신이 전문가적 실존을 사적 실존보다 더 우선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한 배에 탄 사람은 같은 운명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 배가 침몰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스티븐스에게 노인이 말한다.
"이봐요, 형씨.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건지 어떤지 모르겠소만, 만약 나한테 묻는다면 이런 태도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알겠어요?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기 마련이거든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그러고 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_본문 299~300쪽.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만 하다.
(중략)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저렇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술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듣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고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다. _본문 300~302쪽.
스티븐스는 자신의 '노력하는 삶'이 그 자체로 의미있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농담이야 말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노력하는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다. 그러나 그 삶에 농담(여유, 사유, 의미)가 있지 않다면, 삶이 삭막해질지도 모른다.
몇년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행했던 단어 중 하나가 '노오오오력'이었다. 그냥 '노력'해서는 안되고, '노오오오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전문가적 실존이 우선시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태를 반영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최근에는 워라밸 등의 단어가 유행하여 사회 분위기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한국인에게,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온 스티븐스의 삶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