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쯤에 친구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추천해 준 적이 있었다. 호기롭게 집어 들었으나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서 몇 장 안 읽고 덮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자는 연애의 과정에 후자는 결혼 후의 일상에 더 초점을 맞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책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두 달 사이에 내가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변한 것인지 아님 연애보다 결혼의 이야기가 더 재밌었던 것인지 금세 읽어 내려갔다.
P.12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여러 가지 사랑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사랑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품기도 하는 나는 ‘이미 결혼을 하였나보다’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결혼한 사람들은 상대가 영혼의 짝이라는 확신을 갖고 결혼식장에 들어섰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P.22 대신에 라비는 내면과 외면의 특질들이 가장 특이하게 조합된-지성과 친절함, 유머와 아름다움, 담력과 순수함을 지닌-사람을 발견했다고 확신한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자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P.81 일반 사회가 점잔을 빼느라 탐험하기 꺼려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어쩌면 이것을 문학의 요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권위 있는 책들을 보면 이 저자는 어떻게 우리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 수 있었을까 하며 위안과 감사를 느끼고 경탄하게 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발견한 뜻밖의 문학의 대한 재정의. 정말 공감한다.
P.105 "당신의 그 공상은 생소한데다 솔직히 말하면 좀 역하기도 해. 그래도 그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 내가 상대적으로 편안한 것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처하는 내 능력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당신 마음속 기이한 구석구석들을 알고 싶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싶어. 당신이 바라는 모든 일을 하거나 당신이 바라는 모든 존재가 되진 못할 거야.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서로 용기 있게 얘기하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는 있다고 믿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침묵과 거짓말인데, 그건 사랑의 진짜 적이잖아."
책은 앞부분에서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은 비교적 짧게 묘사하고 결혼 후의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의 심정이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8살 정도까지 키운 후에 이 책을 읽으면 뒷부분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후의 일상은 핑크빛보다는 피 튀기는 빨간빛에 가까웠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의 지속을 지켜보는 것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접했던 수많은 러브스토리는 사랑의 시작만을 집중해서 조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도 나에게 사랑이 지속되는 과정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이 책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사랑의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순간들을 내게 일러주었다.
지난 나흘간 천안에 내려가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친구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항상 그렇듯 남자친구 얘기가 80%였다. 예전에는 마냥 남의 이야기로만 여겼었는데, 이번에는 남자친구에 대한 서운함과 자랑스러움이 교차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만 계속되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주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사랑이란 무엇인지 점점 더 알아가고 있구나, 내 친구들이지만 잘 자라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었다.
P.278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커스틴이 까다로운 게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라비가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읽다보니 알랭 드 보통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인생의 한 단계로서의 결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 인용구의 '결혼할'을 '살아갈'로, '커스틴'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바꾸면 그게 바로 잘 사는 방법 아니겠는가 .아쉽게도 우리는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 때문에 삶을 마무리 할 때쯤에야 살아갈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