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작년까지만 해도 누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자랑스럽게 “스무 살이에요”라고 말했는데 여기에 ‘한’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괴리감이 온다. 스무 살은 그만의 느낌이 있다. 편의점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한 캔 살 때의 뿌듯함도 스무 살만 맛볼 수 있고, 동아리 모임에서 고학년 선배들에게 자기소개를 할 때도 스무 살은 왠지 모를 자신감이 붙는다. 이런 스무 살이 제일 스무 살 다울 때는 대학교 1학년, 새내기일 때가 아닐까. 학벌주의, 대학만능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12년간의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을 마치고 들어간 대학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는 조금 다르다. 스승의 날에 반 아이들과 돈을 모아 꽃다발을 사드릴 담임선생님도 없고, 땡볕에 서서 땀 흘리는 전체조례도 없다. 내신대비를 해주는 학원도 없고, 선생님이 시험지를 빨간색 색연필로 매기지도 않는다. 안 그래도 어른이라고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는데 이렇게 새로운 학습 환경에 내던져지니 스무 살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이 스무 살을 규정하는 가장 큰 코드다.
‘낯섦’이라는 껍데기를 빨리 벗는 스무 살은 많지 않다. 그래서 흔히 스물한 살까지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나도 그중 한 사람일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대학에서의 공부에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 입학해서 시간표를 짤 때의 그 설렘은 잊지를 못한다. 과목 이름도 멋있게 ‘디지털 영상과 예술의 시대’, ‘한국대중문화론’이라니. 이제 내가 듣고 싶은 과목만 들으면서 밤새워서 리포트도 써보고, 수업 중에 모르는 게 생기면 손을 번쩍 들어 교수님 눈도장을 찍으리라. 그렇게 패기가 넘쳐서 어렵다고 소문난 과목으로만 18학점을 채웠다. 주5일에 모두 아침 9시 수업이 있었다. 고등학교랑 비슷한 생활을 해야 공부도 그때처럼 부지런하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뭐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오후 늦게 첫 수업을 들으면 그전까진 집에서 뒹굴거릴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고등학교식 공부는 부지런했지만 무작정 대학 공부에 적용한 건 무모한 시도였다. 학문을 배우는 건 얕은 곳부터 깊은 곳까지 구덩이를 파는 것과 같다. 대학 공부는 한 곳을 집중해서 파는 것이다. 한 삽 한 삽 끈질기게 파내면 지하수든 석탄이든 무엇인가에 닿는다. 그러나 고등학교 공부는 여기저기 흙을 헤집는 것과 비슷하다. “대학 가고 싶으면 과목 간 균형을 맞춰라.” 내가 들었던 인터넷강의 강사는 밥 먹듯이 이 말을 했다. 한쪽만 너무 깊이 파느라 다른 쪽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게 요점이다. 이 구덩이를 파다 보면 전에 파놨던 저 구덩이는 다시 흙이 쌓인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파고, 결국 깊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그런 공부가 고등학교 때 했던 입시 공부인 것이다. 어제 읽었던 EBS 영어 지문이 수능에 나올 수 있으니까 오늘 다시 읽고, 같은 유형의 수학문제를 수능 때 빨리 풀 수 있도록 숫자만 바꿔서 다시 푸는 것이다. 이런 공부에 익숙한 내게 대학은 너무 많은 걸 요구했다. 특히 인문학 수업이 그랬다. 답이 없고, 추상적인 내용이 많아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깊은 구덩이를 파기에 내 삽은 너무 작고 녹슬어있달까. 교수님의 설명, 읽어야 하는 텍스트, 수업에 필요한 기본 상식은 내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위였다. 추가적인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포맷은 주5일 아침 9시 수업이라는 고등학교식 시간표를 적용했으니 더욱 힘들었다. 한 번 당했으니 2학기 시간표부터는 선배의 조언과 현실적 여건 등을 고려해 짰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끔 대학 공부와 고등학교 공부의 괴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니 스물한 살이라고 나를 소개할 때, ‘내가 벌써 대학교 2학년인가? 난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하며 당황하는 것이다.
吾十有五而 志于學 三十而立. 공자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스스로 자립했다. 스물한 살은 그 사이에 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공부법은 흔히들 알듯이 여섯 단계다. 열다섯 살과 서른 다음, 마흔엔 흔들리지 않고, 쉰에 천명을 안다. 예순에 귀가 들은 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일흔에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했지만 법도를 넘는 일이 없었다. 공자는 서른부터 일흔까지는 십 년에 한 번씩 목표를 두었지만 열다섯 살에서 서른까지는 십오 년이다. 그만큼 배움에 뜻을 둔 뒤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스스로 서는 일은 어렵다. 스스로 서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회의감이다. 겨우 철이 들어 배움에 뜻을 두어도 내가 하는 이 배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걸까,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왜 난 모를까, 나는 왜 이걸 배우는 걸까. 배우는 과정에서 느끼는 회의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즐거움이 없어서 드는 회의와 즐거움이 있는데도 느끼는 회의. <논어> 학이편에 등장하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그 구절을 보자.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부는 즐거워야 하는데 즐겁지 않으면 회의가 든다. 이것의 해결은 간단하다. 이 학문을 접하는 내 방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가령 내가 영어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스파르타식’ 교육을 주창하는 학원에서였다. 선생님은 매일 단어 100개씩을 외워 와라고 했고 시험을 망치면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았다. 학원뿐 아니라 집에서도 동영상을 보며 따라 말하기를 시켰다. 프랜차이즈 학원이었기 때문에 내가 동영상 학습을 한 시간이 기록되어 전국 순위가 매겨졌다. 전국 100위 안에 들면 학원에서는 현수막을 걸고, 상품권을 줬다. 나는 영어를 혐오했다. 그래도 정신 차리고 보면 나는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flash, flee, floor,…’ 그러다 한번은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 화상 전화로 수업을 했었다. 필리핀에 사는 여자 선생님은 언니처럼 나를 대했다. “오늘 뭐 했니?” “속상한 일 있었니?” 선생님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영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을 안 맞기 위해서가 아닌, 선생님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외웠다. 이렇게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어려우면 쉽게 방법만 바꿔도 나에게 다가오는 학문의 모습은 바뀔 수 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안 생기면 ‘쿨하게’ 놔주면 된다. 그 공부는 ‘내 길’이 아닌 것이다. 흔히 동양인들은 뭐든지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본인이 못하는 것에 집중한다. 중국계 미국 여성으로 예일대 법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가 쓴 <호랑이 엄마의 군가>에서 그녀는 두 딸을 강압적으로 키운 중국식 교육법을 소개한다. 그녀는 딸이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무섭게 다그쳤다. 피아노가 싫다는 딸을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혀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피아노를 치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한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양에서는 지적 성취가 일정 부분 타고난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는 기본적으로 공부한다고 점수가 오르는 시험이 아니다. 타고난 능력을 파악하는 시험이다. 그래서 억지로 배우는 공부를 좋게 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과도한 일반화는 해선 안 되지만, 마음에도 없는 학과를 ‘점수 맞춰’ 들어와서 고생하는 대학생들이 생각해봐야 할 태도라고 본다.
즐거움이 있는데도 느끼는 회의는 좀 더 복잡하다.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진입했다. 문학이 좋고, 글쓰기가 좋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생활기록부 ‘희망 전공’ 란에 썼던 학과다. 지원서를 낼 수 있는 6개 대학에 수시를 쓸 때도 모두 국어국문학과로 넣었다. 국어 선생님은 내가 본인이 나온 과에 간다고 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러나 “잘했다”라고 말하진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쓰다듦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 같다. 출판사를 하시는 부모님은 내가 인문학을 한다고 하자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러나 세 살 어린 동생이 문과를 간다고 하자 이과를 가는 게 어떻겠냐고 걱정스레 제안하셨다. 2학년 때까지 나는 성대신문사에 문화부 기자로 있었다. 매주 회의에 밤새워서 기사를 쓰다 보면 학점 챙길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우리 신문사에는 국문학과, 철학과, 사학과 같은 문과생들이 많다. 조판을 끝내고 다 같이 모여 술 한잔 하다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뒤에 우린 뭘 하고 있을까. 꿈꾸는 직업, 바라던 삶까지 순탄하게 다다라 있을까. 스펙 사랑 대한민국에서 순수 학문을 한다는 건 어렵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다가도 회의감에 빠질 때가 있다. 공부를 안 하면 걱정이어야 하는 데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확신을 가지면 된다. 인간이 안정적인 직업, 금전적인 성공만 바라고 살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학문, 이걸로 뭘 먹고 살까 의심하지 않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들이 다다르지 못한 그 경지까지 추구한다면 그것은 나의 최종 목표, 성공과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스물한 살, 열다섯 살과 서른 살의 사이에 나는 한 단계를 더 넣고 싶다. 二十一信吾. 나를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