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으랴’ 라는 논어의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공자가 내 또래였다면 절대 친하게 지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시험기간도 아닌데 도서관에 앉아서 과제를 하며 즐거워할 친구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나의 인식이 바뀐 계기는 책에 나온 또 다른 해석이다. 원문인 ‘학이시습지’ 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시는 적절한 시기로 해석한다면, 이 구절에는 ‘배우고 이것을 시의 적절한 때에 실천한다면 그것이 기쁨’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된다. 나는 이 구절이 학습하는 인간에게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기쁨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지 않으면 적절한 때에 알맞은 행동을 할 수 없고, 따라서 행복해질 수 없다. 배웠더라도 이를 적절한 때에 실천할 수 없다면 여기서도 행복을 얻을 수 없다. 배움과 이를 실천할 기회와 의지가 모두 있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배움의 기쁨이 현대사회에서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퇴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경쟁은 학습의 목표를 현재의 즐거움에 두지 않고 추상적인 미래에 맡겨버린다. 그 결과 실천을 중요시하지 않게 되고, 정작 실천이 필요할 때 학습과 실천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는 수능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입시에 실패했을 때였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성적이 나온다는 소리만 듣고 공부해왔던 나에게 대입의 실패는 이제껏 추구해왔던 모든 가치의 상실이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전교 등수에 신경 쓰며 조마조마하게 해왔던 모든 공부는 모두 대입이라는 가치 하나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그 과정 자체에 대한 가치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학습에서 야기되는 치열한 고통을 숭고하게 포장해 이를 권장했다. 각박한 경쟁사회 속에서, 실천이 결핍된 추상적 행복 추구 수단으로서의 학습은 오히려 불행을 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오늘날의 우리와 공자는 모두 학습에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열 가구가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성실과 믿음이 나와 같은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한 만큼 공자에게 학습이 행복이고, 우리에게 학습이 불행이 되어버린 것은 진정한 학습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 공자는 실천을 겸비한 학습을 하였고, 우리는 실천이 결핍된 학습을 하고 있다. 공자는 현재의 학습에서 기쁨을 찾았다면 우리는 미래의 막연한 기쁨에 대한 기대를 가진 채 현재 학습의 고통을 감내한다. 공자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학습한다면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인식해 학습한다. 사람의 인생이 다양한 학습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잘못된 학습은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많은 행복을 앗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쟁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자는 어울려 사는 삶을 강조한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소통과 만남이다. 혹자는 당시 사회가 지금과 다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어가 쓰인 춘추전국시대는 현대사회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빠른 변화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질서가 뒤집히고, 전통적인 관념이 흔들리는 현대사회와 같이 춘추전국시대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멀리서 친구가 찾아온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이동도 소통도 지금보다 어려운 사회였으므로 정말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을 것이다. 바뀌어 가는 사회에서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예전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변화에 대해 인정하고 소통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경쟁은 다양성의 억압과 가치의 획일화에서 유발된다. 모두가 같은 가치만을 향해 달려가면서 과도한 경쟁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쟁사회의 해결은 다양성의 존중에서 시작하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이 소통이다. 현대사회는 그 당시보다 소통의 수단은 발달해서 어느 때나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러한 소통의 수단이 더 깊고 열린 소통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SNS는 표현의 자유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해 거짓된 자신을 꾸며내는 장이 되기도 했다. 예전의 의사소통이 장문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단문과 이미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나 또한 이러한 문제로 고민을 겪은 적이 있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다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말 중요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다. 결국 많은 대화 속에서 서로의 고민과 문제는 배제된 채로 고립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소통과 만남의 첫걸음이 될 것이며, 경쟁사회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그것이 호감이든 증오든, 무관심보다는 나은 것이 될 수 있다. 서머셋 몸의 'red‘라는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랑의 비극은 결국 죽음도 이별도 아니란 말이오. 그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지난날에는 하루만 만나지 않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했던 여자를 지금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그보다 무서운 비극은 없소. 사랑에 있어 진짜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사랑 안에는 증오가 있을 수 있고, 증오보다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는 깨달음은 단지 사랑만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대한 관심에 대한 것으로도 확장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리에 있는 노숙인들을 보고 그들의 무력함에 대해 증오하다보면 그들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얼마나 많은 문제들에 무관심해 왔는가, 얼마나 사랑이 결핍된 삶을 살고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