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다. 특히 공자가 제자들과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토론한 내용과 대답을 ‘논’, 제자들에게 전한 가르침은 ‘어’라고 칭한다. 이 책 ‘논어강설’은 논어의 본문을 인용, 번역하고, 그 내용을 강론하며 설명하고 있다. 한자를 풀이하며 문법 자체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어서, 그 내용과 더불어 한자라는 문자의 형식에 대한 공부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책이었다.
성균관대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주 들었을 단어 ‘논어’. ‘인성고전’이라는 수업 시간에서도 다뤘었고, ‘논어’ 수업 시간에도 다루고 있는 주제이자 책이다. 졸업 전 꼭 수강해야하는 수업이기도 하지만, 교시인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건학이념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논어는 우리 학교의 교육적 가치관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
논어를 살펴보면, 공자는 인의예지 중에서도 인(仁)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사람’과 ‘사람다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법과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이지만, 모든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그러한 ‘다움’에 대한 공감의 부재가, 지금 이 시대에 논어를 다시 읽어야하고, 논어를 통해 바른 인성을 향유해야함을 많은 사람들이 설파하는 이유가 아닐까?
논어는 결국 자신을 ‘수양’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설파한다. 어떠한 지식을 전승받는 것은 ‘강학’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지식의 축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받아들인 지식을 내면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고, ‘어떻게 활용하느냐’라는 것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수양 정도에 따라 다르다. 논어강설의 학이편, 제16장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子曰不患人之不己知(자왈불환인지불기지)요 患不知人也(환부지인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공자의 위와 같은 말은 새삼 자기 수양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영양가 없는 정보를 그저 보여주기 식으로 뽐내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오늘날이다. 강학을 하고 어떠한 노력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전시하고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자신이 중요한 나머지, 남의 노력은 못본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내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혹은 불행한 사람인지, 나와 내가 아는 것을 전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공자의 많은 말들 중에서도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에 대한 기대의 일환으로, 내가 남을 먼저 알아주면, 그 사람 또한 나에 대해서 알아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다.
다만, 양화편 제25장에 따르면, 공자는 ‘여자와 소인은 거두기가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망한다.’ 라고 말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논어의 한계를 느꼈다. 책마다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해당 구절에서 칭하는 여성이 가장 보통의 여성을 대표한다는 의견과 그렇지 않고 일부 여성을 뜻하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 책에서는 ‘공자에게 접근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정하여 해석하였고, 접근을 허락하면 소유욕이 발동해 불손해지기 때문에 여자를 멀리하라고 말했다고 해석하였다.), 하지면 여러 가지 해석의 경우의 수들을 고려해보아도, 역시 당대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결국 이성의 접근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관계가 반드시 ‘소유’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용되는 이야기이지만, 소유하는 사랑을 지양해야하는 것과 아예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이다. ‘사람다움’이란, 사람들이 모이고 관계를 맻으며, 그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처럼 우리는 당대의 상황에 따라 기존의 법과 제도를 재정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인 점은 경전은 끊임없이 재해석 되어야 하고(또한 그럴 수 있고), 우리는 우리의 가치에 맞는 해석을 차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논어읽기는 어떠한 성인에 대한 추앙이 아니라, 해석에 대한 의문의 연속으로서 존속해 나가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