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긍지와 왜곡된 명예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는 행위는 또 어떤가? 첫 번째 가설. 나체는 그들에게 가장 귀중한 자유, 가장 위협받는 가치를 표상했다. … 두 번째 가설. 그 독일 좌파들은 어떤 가치의 상징을 앞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대중에게 혐오스러운 충격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질겁 시키고, 그들을 분개시키는 것. 묘한 딜레마: 나체는 가치 가운데 가장 큰 가치인 자유를 상징하는가? 아니면 가장 혐오스러운 더러운 오물을 상징하는가? (느림, 민음사, 김병욱 옮김, 133-134)
예술로 해석될 수 있고, 사회의 갈등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나체는 분명 긍지를 가질만한 행위이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삶의 가치를 살인으로 정하는 사람은 없다. 저격수와 도덕 싸움을 하면 춤꾼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 춤꾼들은 생명에 돈을 매길 순 없다며, 자네 부모님이 적이라면 죽일 수 있을 거냐며, 저격수의 긍지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춤꾼이 된 저격수는 살인을 정당화하는 다른 가치들을 나열할 것이다. 종교적 이유, 조국을 위한 희생, 전우애 등 다양한 가치들은 살인에 긍지를 부여한다. 저격수는 살인을 했지만, 역설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다.
도덕 싸움을 거는 춤꾼들은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행위로 표현했다는 긍지. 합리화로 교묘하게 조작된 신념일지라도 상대방에게 존중을 끌어냈다는 긍지 때문에 패배해도 춤꾼들은 낙담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기부 포비아를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을 약화시킨 어금니 아빠도 긍지가 있지 않았을까? 방송을 활용해 대중들에게 측은지심과 도덕적 행동을 불러일으킨 어금니 아빠. 그 긍지는 이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긍지는 개인적인 언어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런데, 긍지는 언행이 긍정적으로 일치되었을 때 언급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갈 가치를 지향하고 실천할 때 ‘긍지’라는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은가?
명예의 성격이 변한다 할지라도, 명예는 소수 특권층에게만 관계된 일이 아니다. 명예는 모든 사람에게 관계되어 있다. (50)
오늘날 유명인들은 잡지,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하여 모든 이의 상상력에 침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명예의 대산이 될 가능성을 근심한다. 이 가능성은 모든 이를 그림자처럼 뒤쫓으며 그 삶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실존이 갖는 새로운 가능성은 비록 실존이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라도, 실존 전체를 탈바꿈시키는 까닭이다. (51)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나’의 긍지는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영향을 준다. 나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명예롭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주관은 명예를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나는 명예를 인기X존중으로 단순하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으면서, 괜찮은 사람으로 존중받는 일은 얼마나 명예로운가? 하지만 ‘인기와 존중’의 기준이 모호하다. 역설적으로 그 모호함이 모두를 명예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살인을 하고도 가치가 선하다면 명예로울 수 있다. 살인을 하고도 주변 사람들이 존중을 해준다면 우리는 명예로울 수 있다. 이게 무슨 명예란 말인가? 주변인들의 존중이 아첨으로,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이 합리화로 바뀌는 경계는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가? 합리화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너무 유용한 도구다. 끔찍하리만큼 유용하다.
사람은 명예 또는 불명예의 대상이 될 가능성과 누군가에겐 명예로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잘못된 긍지를 만들기도 한다. 가령 우리는 명예롭지 않은 사람이 가족에게만큼은 명예롭고자 하는 경우를 쉽게 매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명예가 합리화와 아첨으로 점철된 자신의 거짓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까?
긍지와 명예를 왜곡하는 망각X속도
잘못된 긍지는 합리화와 아첨을 만들어내고, 합리화와 아첨은 잘못된 긍지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이 악순환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망각이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블랙 미러’라는 드라마가 있다. 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은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장치를 활용하여 모든 기억을 재생할 수 있다. 행복한 시간, 떠올리고 싶은 부모님의 모습, 추억 등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 저장은 훌륭한 기술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 말미에 주인공은 아내의 기억 창고에서 불륜을 보게 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우리가 모든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순간이 기억나는 사람은 자가당착에 쉽게 빠질 것이다. 모든 기억은 “인간의 행동이 도덕적 가치들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그 도덕이 상황에 따라 합리화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말해주고, 부끄러움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망각할 수 있으므로, 잘못된 긍지를 생산해낼 수 있다.
기술의 발달은 주의를 분산시켜 망각을 더욱 부추긴다. 맞춤화된 정보의 홍수를 제공하는 기술들은 무아지경을 안겨준다. 카카오톡은 우리를 24시간 대기하게 하고, 유튜브는 무한한 콘텐츠를 중개한다. 가상은 현실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도구처럼 보이나, 오히려 제2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가상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잠 잘 때 빼곤 어떤 휴식도 취할 수 없다. 잠도 무아지경의 상태라면, 사색의 시간은 전혀 없다.
식판에만 고개를 처박고 밥을 먹으면, 급식실에는 나와 음식만 존재한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든다.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누가 이기적으로 급식을 받는지, 누가 질서를 지키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면 밥을 늦게 먹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사회의 속도는 인간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는 효율적인 삶을 강제한다. 떠올리는 데 필요한 시간은 비효율이다. 사색과 성찰, 느림도 비효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 시간에 사람들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제 지표는 삶의 질, 문화, 여가와 같은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인 사색이나 성찰은 경제적인 지표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중요하지 않단 뜻은 아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삶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담론은 우리를 자본주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노예는 사색할 수도, 성찰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를 극대화하는 성과주의는 사색, 성찰, 사유를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망각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든다. 나는 효율이 다른 의미를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찰하고, 사유하여 세상에 우뚝 서기 위해 인간이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루를 효율적으로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과 사회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무한도전 QnA 특집에서 유재석은 유시민에게 ‘그만둬야 할 때’를 물었다. 유시민은 “쓰임새가 없어진다고 판단될 때,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것 아니냐.”라며 조언해주었다. 쓰임새가 없어진다고 판단하는 일은 성찰과 사색을 필요로 한다. 성찰과 사색은 ‘느린’ 일이다. 긍지와 명예를 되돌아보는 일은 느림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있다면 느려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느려야만 할 때는 오히려 무언가 잘하고 있을 때가 아닐까.
이 글은 제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334051723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334052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