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사형제도가 법률 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지난 1997년 이후 단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10년 이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나라를 ‘사실상 사형 폐지국’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도 그 범주 안에 속해 있다. 이에 사형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는 여러 인권 단체와 종교계의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제출된 ‘사형 폐지 법안’은 번번이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평균적으로 선고 후 3개월 이내에 진행되는 사형 집행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사형수가
60여명 정도 있다고 한다. 사형제도의 존치 여부가 여전히
논쟁의 주제로 다뤄지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형제도는 명목만이 껍데기처럼 남아 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당시 철학과 윤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이성'과 '인간의 권리'가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며 수업에서 다뤘던 내용인 '사형'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 학교 수업에서 처음 다루었을 때부터 전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한 이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 입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법의 보호 대상에 흉악범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진정한 ‘윤리적인 세상’을 구현하는 것인지, 처벌의 목적인 범죄자의 ‘교화’가 과연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늘 의문이었다.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거나 이미 제도 자체를 폐지한 국가들의 수치를 비교하며 교화와 재사회화의 가능성을 논하고, 사형제도와 범죄률의 상관관계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미국의 경우에도 주에 따라 수치와 관계가 상이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차례, 세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그 동안의 직·간접적인 토론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으나, 늘 각자의 입장에 유리한 연구 자료를 찾아와 근거로 내세우는 것을 보고
하나의 정설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이유가 보복성에 바탕을 둔, 피해자
가족의 정신적 보상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가해자의 생명권을 박탈한다고 해서 그 상실감을 보상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노와 슬픔은 시나브로 사라질 것이고,
가해자를 희생시킨들 피해자 가족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우리와 그들 모두 알고 있다. 그렇기에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복수를 할 수 있는가’ 라는 반박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살인에 대한 ‘복수’는 피해자 가족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데 앞서 언급했듯 그 ‘복수’는 분노의 돌파구로 잠시 작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수의 정신적
피해를 없애기 위해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의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여론의 비난을 받고 묻힌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대중 또한 피해자 입장에 아주 깊이 공감하게 되어 범죄자에게 ‘너도
당해봐라’는 식으로 사형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범죄자가 감옥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사용되는 국가 예산, 세금이 납득되지 않는 것이고, 이후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로 돌아왔을 때 또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두려운 것이다. 사회는 복잡해지고, 개인화는 심화되고, 매체에서는 끊임없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기에 최근 20년간
이슈화된 살인 사건들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반인간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방식이 더욱 잔인해진 것도
맞지만, ‘묻지마 살인’처럼 이유 없이 혹은 너무나도 사소한
마찰로 인해 저질러진 살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를 통해 다루고 지고 있다. 이러한 범죄자들이 무기징역도, 종신형도 아닌 겨우 10여년에 불과한 시간을 처벌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는
사실이 대중을 분노하고, 걱정하고, 사형 제도에 찬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들의 생명을 감옥에서 연장시키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과연 교화와 재사회화로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그 시간과 비용을 들일 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
2600여 년 전 진나라 사법관인 이리(李離)는 사건 기록을
보다가 무고한 이에게 사형을 판결해 죽게 한 것을 뒤늦게 알고, 부하에게 자신을 포박해 옥에 가두어
사형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왕이 실무를 담당한 부하의 잘못이니 자책하지 말라며 이리를 만류하자 그는
“형벌을 잘못 판결하면 자신이 형벌을 받아야 하고, 사형을
오판하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고 결국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은 일제강점기 시절, 판사를 하다가
출가하였다. 평양에서 판사 생활을 하던 그는 1923년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내린 뒤 ‘내가 무슨 권리로 사형 판결을 할 수 있는가’라는
번민에 휩싸여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법복을 벗고 스님이 되었다.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은 판사 초임 시절인 1981년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에서 그가 내린 무기징역 선고가 33년 뒤 재심에서 무죄로 번복되자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오판의 피해자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에 일어난 일이고, 그의 잘못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오판 가능성을 근거로 사형에 반대한다. 실제로
한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기 위해 이를 음료수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형제도 폐지 찬성
측에서는 마신 사람 중 4%가 죽는 음료수가 있다면 이는 당연히 폐기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사형제도 또한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 만큼
오판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비유가 정말 인상 깊게 와 닿은 것 같다. 실수할 것이 보장되어 있는 판사에게 사형을 선고할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 듯 절대적 기본권으로
여겨지는 생명권은 인권으로서 쉽게 박탈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중요하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전히 범죄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 가치와 다수가 우려하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형제도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뿐만 아니라 이를 발생시킨 사회와
그 사회를 조성한 우리 모두를 고려 대상으로 두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올바르게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