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책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읽고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할지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천에 앞선 이론의 시작으로 역사를 선택했다. 울스턴 크래프트, 보부아르, 주디스 버틀러도 좋지만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의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게 먼저일듯했다. 사상은 씨앗이다. 작은 씨앗 안에 압축된 알맹이들은 서로 다른 바람과 물을 맞으며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의 나무가 된다. 파시즘, 사회주의, 자본주의..., 많은 사상들도 기본적인 이론과 토대를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사회에서 제각각의 모습을 갖춰간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고착화된 성규범을 해체하고 모든 성이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는 추구점은 같지만 이 목적지를 둘러싼 길을 어떻게 갈고 닦는지는 사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사회 중 윤리와 사상 과목 수업 때였던 것 같다. 처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굉장히 서구적인 사상같아 느꼈던 위화감을 기억한다. 여성주의라는 단어를 번역하지 않은 외국어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교과서 자체에도 페미니즘은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여성 투표권 운동 정도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래선가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페미니즘 운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 절친부터 시작해서 몇몇 여자 교수님들, 선배들, 교내의 여성주의 관련 동아리들, 혹은 학회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페이스북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6년 강남역 사건과 소라넷 고발 사건 이후로 목소리는 더 커졌다. 최근에는 대선 토론 중에 나온 군 동성애 문제로 시끌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도 나는 그렇게 최근의 몇몇 사건으로 우리나라에 페미니즘이 정착한줄만 알았다.
'정착'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우리나라에서 생성된 것이다. 1948년에 처음으로 남녀 보통선거가 실시된 우리나라는 여성이 투표권을 두고 투쟁한 역사가 없다. 그 대신 오랫동안 뿌리 박힌 가부장제와 유교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었다. 책 『대한민국 넷페미史』는 그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를 보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나처럼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주변을 보며 서서히 페미니즘을 알아가고, 또 적극적으로 알렸던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다. 1부에서 권김현영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활동한 영 페미니스트의 행보를 짚는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한 이유는 컴퓨터를 활용한 네트워크가 국내에 처음 들어선 때이기 때문이다. '넷페미'라는 제목의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컴퓨터의 등장은 페미니즘사에서 중요하다. 나 또한 나보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먼저 있었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들의 의견을 들은 곳은 페이스북이 아닌가. 인터넷의 등장은 페미니즘을 대중, 특히 젊은 층의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지식인이나 노동자가 현장에 모여 목청껏 소리쳤던 민주화 혹은 노동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영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PC통신의 여성 모임들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내고 서로의 동지애를 구축했다. 검열과 넷윤리 미비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여성 문제는 대중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가 뜨거워지고 여성 일상 속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2000년에는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가 결성되었다. PC통신 이후 페미니스트들이 활개를 편 주요 무대는 웹진,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 여성주의 인터넷 언론 세 가지가 된다. 무대가 넓어진 만큼 어려움도 커졌다. 페미니스트 유저들은 몇몇 여성 커뮤니티의 상업화 전략에 넘어가기도 하고, 남성 유저와 피튀기게 싸우기도 했다.
2부에서 손희정은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도래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뜸해졌던 때부터 짚는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진 사람들은 운동권 구호인듯 보이는 페미니즘에 의구심을 갖는다. '남성연대'와 같은 남성주의 단체들이 등장하고 여성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 혹은 우회적 태도를 보이는 집단이 생긴다. 그러나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익숙해진 풍경이 있었으니 바로 광장문화다. 그리고 이 민주적 정치참여에 페미니즘이 합세한다. 즉 '촛불 소녀들이 배운 여자로 거듭난' 것이다. 손희정은 또 온라인에서 광장의 역할을 가장 효과적으로 한 플랫폼으로 이 시기 나타난 트위터를 꼽는다. 트위터는 쟁점이 떠오르면 확장부터 내재화까지 빠르게 할 수 있는 SNS
라는 것.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 김진숙 씨가 크레인 위에서 했던 것도,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이후 일어난 '잡년 행진'이
기획된 곳도 트위터였다. 2015년 메갈리아 창설과 함께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에 답하듯 2016년에는 트위터에서 'OOO 내 성폭력' 운동이 벌어졌었다.
책
전반적으로 온라인 쪽 활동에 무게가 더 실렸지만 편집부가 서론에도 말했듯이 온라인 페미니스트와 오프라인 페미니스트가 종종 잘 구분되지 않는다. 3부 강연에서 이민경은 이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온라인은 또 하나의 확장된 현실이다. 차라리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이뤄졌던 대한민국의 여성 운동사를 좀더 폭넓게 다뤄서 '넷페미사' 대신 '페미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 그런 책은 이미 있으려나. 그렇다면 얼른 찾아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