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주인공인 싱클레어의 성장소설이다. 소설 데미안은 전체적으로 말하기 방식을 통해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이야기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괴롭힌 친구로부터 그를 구해준 후 그들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싱클레어는 신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데미안의 생각과 행동에 매료되며 그를 동경하게 된다. 목사의 아들인 싱클레어에게 이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신과 악마.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한 세계는 지향해야하는 것, 다른 세계는 배척해야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가진 그에게 "형제를 죽이고 신에게 미움을 받는 카인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대담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라는 데미안의 말은 그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 싱클레어는 김나지움에 들어가게 되고, 데미안과 헤어지게 된다. 이후로 그에게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어릴 적 자신이 고수하려했던 선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술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어릴 적 배척했던 세계가 이제 자신의 세계라 생각한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중 데미안과 조우한다. 싱클레어의 모습을 본 데미안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인다. 다른 세계 속으로 온 그를 칭찬하며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며 위로한다.
데미안이 추구했던 것은 선의 세계도, 악의 세계도 아니었다. 그는 싱클레어가 자신만의 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원했다. 어릴 적 그가 소속되어 있으려 노력했던 신의 세계는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었다. 목사였던 싱클레어의 아버지가 구축한 세상이었다. 마찬가지로 중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변화된 싱클레어의 세계 또한 그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선의 세계로 부터 파생되어 나온 세계였다. 데미안의 걱정과 위로는 싱클레어에게 "선의 세계를 고수하기 위해 위선적이고, 악의 세계를 위해 위악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메시지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이는 데미안이 방황하고 있는 싱클레어에게 보낸 편지이다. 여기서 아프락사스는 남자와 여자, 선과 악,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신으로 묘사된다. 아프라삭스는 단순히 '모 아니면 도' 식의 양자택일의 신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뜻한다.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개념들마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세계. 인간 개개인의 아프락사스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현재 속해 있는 세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것처럼, 소설 데미안의 저자는 데미안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을 것이다.
소설에서 데미안은 어떠한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순간 그 세계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가 아닌, 데미안의 세계 즉, 타인의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를 정의내리는 순간 타자의 지향점이 반영되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떠한 답을 찾으려는 독자들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저자가 독자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린 후, 구원의 손길 하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데미안은 시종일관 똑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타인이 만든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만든 세계를 향해 가라고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의 통과의례들을 감내해야한다. 고등학교 진학 후 대학교 입학 그 후 취업 혹은 공무원. 성공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취준생에게 데미안은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찾으라고.
반대로 소설에서 타인의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을 단순히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이는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 목사와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피스토리우스 목사는 이상적으로는 새로운 종파를 설교하고 싶지만, 자신이 이교도라며 배척당할까봐 현실에 순응하여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목사이다. 싱클레어는 그가 자신의 이상에 맞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나무라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사과한다.
싱클레어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찾을 것인지, 피스토리우스 목사처럼 이상을 꿈꾸지만 현실에 순응할 것인지.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