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은 무언가를 개념 짓거나 규정내리는 ‘이름’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욕망’을 갖지 않는 ‘도’에 대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도덕경에 따르면 현대 사회 속에서 1등과 꼴등, 천재와 바보 등 많은 것들을 구분 짓고 분별하는 것과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은 가지지 못함에 괴로워하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 경쟁하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병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노자의 도는 무언가를 정의 내린다는 명 자체를 없애는 것을 통해 허기심 실기복 : ‘마음은 비우고 배는 부르게 한다’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도덕경 1장을 읽으며 지난 날 논어 에세이 공모전에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떠올랐다. 공모전은 공자의 논어를 기반으로 인격과 역량을 키워 조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뤄내는 것을 주제로 하였는데 그 의미에서부터 골치가 아팠다. 어떤 것이 조화롭고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했던 에세이는 인, 의, 예, 지, 효, 충 등의 너무도 많은 개념에 의해 갈수록 그 기준을 잡기가 어려워졌다. 한 예로 어버이가 도둑질을 하였을 때 자식이 어버이를 고발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에 대해 공자는 고발하지 않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되 부모가 올바른 마음을 가지실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간언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행동이 진정으로 곧은 것이라고 하셨지만 공자의 말씀이 담긴 논어를 통해 보았을 때 이는 사회가 올바르고 정의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덕인 의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됐다. 또한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공자처럼 단정 짓지 않고 다만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동이 모든 신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섭공과 이우테프론 등은 이를 고발해야한다고 했던 점은 인과 의라는 기준이 개인과 사회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는 도덕경 1장에 나오는 ‘ 길이 바른 길이라도 참길이 아니고’ 라는 문장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올바른 행동의 준칙의 기능을 하는 논어이지만 그것이 결코 어느 사회, 어느 상황에서나 통용되는 절대적인 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챙겨야 할 너무나 많은 개념과 덕목들, 동시에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그러한 덕목들을 보며 과연 언제나 옳은 참도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 아마 노자의 도덕경에 따르면 노자의 도 역시 언제나 올바른 참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덕경의 도는 무명과 무욕의 강조를 통해 마음을 편히 해준다는 점에서 에세이를 쓰며 받던 스트레스들을 가라앉혀주어 잠깐 동안 조금은 마음을 비우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13장에서는 총애와 모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3장에 따르면 총애는 언제 잃게 될지 모름으로 두려움이며 사람들은 그에 더욱 집착하며 불안해한다. 하지만 오히려 걱정은 살아있음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걱정을 하는 것 자체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기 때문에 걱정이 귀한 것과 같다는 어찌 보면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보며 지난 학창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어느 날 우연처럼 전교3등이라는 석차를 받자 담임 선생님의 뜨거운 관심과 친절이 시작되었다. 대입이라는 입시경쟁 속에서 선생님의 관심이라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에게 꽤나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때부터 그 관심을 잃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만 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절친한 친구였던 아이는 어느새 나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지켜보며 경쟁해야만 하는 상대가 되었고, 다함께 성장하는 것에 느꼈었던 즐거움은 다른 이를 제치고 1등을 해냈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교 석차가 1등이라도 떨어지면 꽤나 슬퍼하며 그날은 하루 종일 우울해했던 기억이 난다. 이는 도덕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부 잘하는 아이, 선생님의 기대라는 명이 주입되자 자연스레 총애를 유지시키기 위해 욕이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주변어른들로부터 들었던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커서는 선생님들께 지금은 좋은 대학 가는 것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들이 모여 ‘명’을 이루었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성적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망으로 발현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과열경쟁은 비단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구성원들에게 ‘명’을 주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을 없애고 욕을 비움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는 ‘도’는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이외에도 도덕경은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론의 내용 역시 담고 있다. 도에 따르면 사람은 수, 상, 행, 식 의 단계를 거쳐 사물을 인식하며 그 중 식은 모든 과정을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인식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식은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며 사물은 그저 사물이지만 인간이 식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서 명을 만들어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림은 그저 색과 선, 점 등으로 이루어진 종이위의 표현일 뿐이지만 인간이 그것을 주관적인 식에 따라 인식하면서 명화, 걸작, 망작 이라는 명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며 교수님께서는 현대의 많은 사회적 갈등과 인간관계 등을 말씀해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누군가의 독설과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에게 (물론 그놈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그냥 잊어버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물론 상대방에게 위로를 표하려는 표현이었겠지만 상처를 받았더라도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잊는 것을 해결책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히 잘못한 것은 상처를 준 사람일 텐데 그것을 왜 나름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잊고 말아야 할 문제인지 의구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도덕경을 계속 공부하면서 도를 배워나가자 차츰 이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도덕경의 도는 허기심실기복의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바른 것을 찾아 분별을 두고자 하면 끝없는 이름과 싶음에 사로잡히게 되며 인간은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냥 잊어버리라는 말은 모든 것은 식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므로 식 자체에서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무시한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의 말은 내게 상처로서 다가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조차 벅찬 각박한 현실 속에서 ‘비움’의 도는 어찌보면 참으로 이상적이지만 동시에 현대사회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가르침으로 내게 다가왔으며 이를 수용하고 삶에 적용시키자 나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평화로워질 수 있었다. 이러한 세세한 가르침들까지 도 작게나마 삶을 ‘행복’한 방향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겪으며 노자의 ‘도’는 진정으로 허기심 실기복 그 자체의 학문임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