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나라로의 꿈
治人事天莫若嗇(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길 때에 아낌보다 중요한 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악명은 낳을지라도 미움은 받지 않는 인색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 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 악명에다 미움까지 받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밖에 없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수업을 듣다 보면, 때론 전혀 다른 이야기의 흐름에서 독특한 만남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분별 있는 군주가 되기 위해서라면 사자와 여우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마키아벨리의 서슬 퍼런 <군주론> 16장에서 발견한 검약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군주론> 속에서 그려지는 군주는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누구보다 명(名)과 욕(欲)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 하는’ 군주였다. 그려지는 인상도 추구되는 목표도 정반대인 두 고전이지만, 적어도 좋은 군주의 모습에 있어서는 일정한 공통점을 가졌던 것이다. 결국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마음이라는 건, 시공을 초월해 어느 정도 같은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약팽소선(若烹小鮮)에서 아담 스미스를 느끼고, 소국과민(小國寡民)에서 지배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공동체와의 겹침상을 엿보며, 지부지(知不知)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났던 것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전개되는 생각들이지만 가끔은 같은 말들과 생각들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했다. 그런 무수히 많은 진리들에 우리가 무슨무슨 이념, 무슨무슨 사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한 결과가, 세상에 나타나는 수많은 말들의 전쟁과 그 무덤으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말들은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임에도, 우리가 우리의 식(識)대로만 모든 걸 편집해서 받아들이려 했기에,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듣지 않게 됐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그럴 듯한 이름이라도 그것이 참이름이 아니게 되는’(名可名 非常名) 까닭은, 사실 이름이 없는 것에 우리가 구태여 욕심을 부려 이름을 붙였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구별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구태여 ‘식’에 기대어 생각을 나눠볼 때 治人事天莫若嗇이라고 말하는 노자의 꿈이 마키아벨리의 생각보다 더 높고 좋은 의미로 보이는 것은, 비록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려 이름을 갖게 돼 버린 노자의 관념이 그럼에도 마키아벨리의 그것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을 위해서라면 상황에 맞춰 공화주의자였던 자신의 신념조차 변화시켰던 마키아벨리였지만, 결국 그 마음 끝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했던 자기 자신의 欲을 놓진 못했기에,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시름시름 앓다 죽은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사람을 매료시키지만 가슴 깊은 곳의 마음까진 울리지 못하는 <군주론>의 말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한계를 갖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전에 있어 가치의 비중을 두는 것이 합리적일까에 대한 의문은 들지만, 그럼에도 <군주론>보다 <도덕경>이 좋은 나라의 꿈을 위한 ‘정치서’로써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였다. 욕심을 버린 ‘척’ 하는 군주와, 실제로 욕심을 ‘버린’ 성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다. 비록 군주로써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해보일지라도, 그 가식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천하에 밝혀져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 우리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사람의 벌거벗은 욕망에만 충실한 자유는 약팽소선을 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날이 서버린 꼬뮌에 대한 환상은 같은 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입지를 좁게 한다. 아무리 좋은 말과 생각도 그 기저의 아뢰아식이 꼬여있다면 참된 길과 참된 이름이 될 수 없다.
단순하게,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마음에 솔직할 때, “Gnothi Seauton”는 역사와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좋은 ‘정치서’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단순하고 쉬운 진리로 사람들의 ‘진짜’ 마음을 사로잡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말을 할지라도 결국 <군주론>은, <도덕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