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제
도덕경으로 본 청소년 폭력 그리고 자살
Ⅰ. 청소년 문제
최근 청소년과 관련된 문제가 연일 화제였다. 특히 학교 폭력은 관련법을 개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화제다. 청소년기는 살아가는데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림을 그리는 시기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청소년기는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중요한 시기다.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 알레르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청소년 본연의 성질과 맞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여러 청소년 문제 중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에 대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도덕경’의 내용을 빌려 해당 문제에 대한 해결방향을 드러내려고 한다.
Ⅱ.청소년 문제 그리고 도덕경
1. 청소년 그리고 부모의 과잉간섭
‘사회복지학자가 읽는 노자 도덕경’의 5장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중 한 구절이 나온다.
『말을 많이 하면 자주 궁해지나니, 텅 빈 가운데를 고수함만 못한다.』
위 구절을 읽고 이어지는 내용을 읽으면서 문뜩 ‘부모의 간섭’에 대해 떠오르게 되었다. 몇 개월 전 고민을 들어주는 한 TV프로그램에서 초등학생인 아이의 꿈이 ‘낚시꾼’이지만, 부모는 다른 직업을 가지길 원했다. 아이가 원하는 ‘꿈’이 있는 정작 부모는 이를 격려해주질 못하고 자신의 ‘꿈’을 자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을 자주하니 자녀와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어, 초등학생인 자녀가 TV프로그램에 신청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해당 아이처럼 부모의 간섭을 극복하려는 아이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아이들 역시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 즉, 부모의 ‘지나친 말’ 때문에 자신을 그대로의 모습을 표출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모의 ‘지나친 말’ 혹은 ‘과잉간섭’은 자녀의 주도성을 해침으로써 그 결과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 부정적인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부모의 과잉간섭은 자녀의 수치심에 영향을 미친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분리되고 개별화 되면서 세상을 탐험하려는 개인의 욕구에 반응하기보다 부모의 욕구에 자신을 맞추고 부모가 원하는 이상화된 거짓 자아를 만들게 된다고 한다. 이런 거짓 자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하지만, 실제로 내면은 절망과 좌절,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수치심을 갖게 된다(김영신, 2008 : 한미혜, 2010에서 재인용). 즉, 부모의 ‘과잉간섭’은 자녀에게 ‘수치심’을 남기게 되는 위험이 따른다.
둘째, 과잉간섭은 일종에 과잉보호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식을 보호하려고 하니 과잉간섭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잉간섭 혹은 과잉보호는 자녀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키게 된다. 청소년의 자아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탄력적으로 반응해야 부모로부터 독립을 한 뒤에도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아는 부모의 과잉간섭에 의해 그 탄력성을 잃어버린다. 이런 자아탄력성의 저하는 청소년의 사회적 위축을 가져오고 ‘우울’로 이어진다고 한다(김영원 외 2명, 2017). ‘우울’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청소년시기에는 큰 위험이다. 청소년기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들도 ‘우울’로 인해 약물을 먹고 극단적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들이 이런 우울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성인들보다 제한적이고 이를 풀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할지 모른다. 따라서 청소년기에는 ‘우울’을 해소하는 방법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우울’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마지막은 청소년의 삶의 만족이다. 청소년기는 아동기에서 성인기로 가는 과도기이다. 이런 시기에는 청소년은 부모의 개입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드릴 수 있다. 이런 시기에 부모의 ‘과잉간섭’은 분명히 과도기에 있는 청소년의 입장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청소년의 삶의 만족이 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학교생활적응과 부모의 양육행동이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김신경 외 2명, 2014)이라는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과잉간섭’ 과 과잉기대가 높을수록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물론 ‘과잉간섭’으로 인해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가 낮다는 연구결과는 아니다. 사람이 제각각 다른 것처럼 부모의 ‘과잉간섭’이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연구(김신경 외 2명, 2014)에서는 부모의 지나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청소년의 만족도가 높았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말을 많이 하면 자주 궁해지나니, 텅 빈 가운데를 고수함만 못한다.』
부모의 ‘과잉간섭’ 도덕경의 한 구절에서 나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간섭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 속에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 상황에서의 간섭은 관심보다는 폭력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노자가 저 구절을 사용한 것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염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야생 코끼리가 어렸을 때, 철로 만들어진 족쇄로 구속하고 온갖 폭력으로 길들이면 후에 밧줄만 묶어놔도 저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친 비유일 수 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간섭’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부모의 사랑, 관심이라는 족쇄로 아이들이 정신적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닐까.
2. 청소년 그리고 학교폭력
앞에서 청소년과 부모의 ‘과잉간섭’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그렇다면 부모의 ‘과잉간섭’은 어디서 오는 걸까. 쉽게 생각하면, 부모가 자녀를 아끼고 자녀가 더 좋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좁혀서 생각하면, 청소년기가 대학입시라는 관문에 놓여있다. 많은 부모들이 대학을 나와야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은 대학진학률이 OECD국가 중 1위이다. 즉, 많은 이들이 대학을 가고자 하며, 그 만큼 소위 ‘명문대학’으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다. 이런 이유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과잉간섭’을 하여, 자녀들을 더 좋은 대학을 보내고 더 좋은 직장을 가지게 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사회분위기와 부모의 과잉간섭에서 청소년들은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부모의 간섭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반항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다양한 선택 중 부모-자식 문제에서 더 나아가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학교폭력’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청소년 학교폭력/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청소년 학교폭력/폭력에 대한 원인은 개인적 요소, 가족환경, 학교문화 등 다양할 것이다. 이 중 두 가지 요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자 한다.
우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던 부모의 ‘과잉간섭’이다. 앞에서 ‘과잉간섭’은 청소년 스스로의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이상적인 가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에게 ‘수치심’으로 남게 될 수 있다고 언급을 했다. 이렇게 형성된 ‘수치심’은 해당 청소년에게 폭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수치심을 관계적 폭력의 원인으로 해석한 연구(김대군, 2013)에서는 모멸된 자기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한 학생을 대상으로 폭력행위를 함으로서 자신의 비참함을 잊기 위해서 라고 한다. 이는 에릭슨의 발달단계론가 같은 맥을 가지고 있다. 에릭슨은 부정적인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해치거나, 부정적인 자아 정체성 갖게 하는 대상을 없애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고 한다. 즉, 부정적인 자의식인 수치심은 이후에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서 가해 경험이 있는 학생들의 가해 이유를 보여준다. 이 중 ‘마음에 안 들어서’, ‘화풀이 또는 스트레스 때문에’ 라는 이유가 고등학생에게 꽤 높은 이유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에 안 들어서’라는 이유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증가했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해당 이유들은 수치심이라는 부분이 어느 정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자의식을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약자인 자들에게 표출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특히 ‘마음에 안 들어서’라는 이유가 그렇다.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등 여러 이유를 대지만, 결국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자의식을 표출할 상대에게 같잖은 이유를 가져다 붙인 것이다.
두 번째로 다룰 원인은 학교문화이다. 이와 관련한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학교문화에 대한 연구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결과가 나왔다. 교사 집단과 학생(청소년) 집단 간의 생각의 차이였다. 우선, 교사 에서는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학교문화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가정환경(초등학교 교사 62.9%, 중학교 교사 58.4%, 고등학교 교사 50.1%)’ 그리고 ‘학생 개인의 정서적 요인(초등학교 교사 21.5%, 중학교 교사 24.7%, 고등학교 교사 27.4%)’으로 뽑고 있다. 즉, 학교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의 답변을 주로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학교문화 형성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뽑는 것은 ‘또래 관계 및 학급 분위기(초등학생 34.9%, 중학생 44.4%, 고등학생 41.8%)’와 ‘학생 개인의 성격(초등학생 28.1%, 중학생 23.3%, 고등학생 25.8%)’이었다.
두 집단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가 교사의 역할과 학교의 역할보다는 학생 자체 혹은 학생의 가정환경 때문에 학교폭력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반면, 학생들은 또래 집단이 모이는 학교, 학급 분위기가 예방에 있어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수치로만 보면, 교사집단 혹은 학교는 학교폭력에 대해 방관자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우리는 문제가 없으나, 학생 혹은 학생의 가정에 문제가 있다.’라는 말이다. 물론 앞에서 ‘부모의 간섭’도 학생이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학교폭력은 단순히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먼저 괴롭혀서 26.8%’, ‘다른 친구가 하니까 8.3%’ 등의 가해이유가 나온다. 또한 주로 피해가 일어나는 장소는 ‘교실 28.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수치들로 보면, 타인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거나 이를 따라한다는 것은 학생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해당 학급이 분위기에 따라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급 분위기는 학생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또래 관계 및 학급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비율이 초등학생의 수치보다 중·고등학생의 수치가 높게 나타난다. 이런 수치의 큰 차이는 중·고등학생 때 청소년들이 성적으로 차별을 받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성적으로 차별받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보다 ‘입시(고등학교 입시 혹은 대학 입시)’에 다가가면서 성적으로 인한 차별이 심화되고 이에 따른 교사의 학생 차별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보다 좋은 고등학교 혹은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만 관심을 가져주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거나 덜 주는 식이다. 또한 학생 상담이라고 하면서, 학생 자체보다는 수치화된 성적 그리고 입시에 대해서만 상담을 진행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이렇게 교사들이 학생들 집단에게 차별을 하면서, 학생집단의 경쟁을 부추긴다. 즉, 학생들 간의 관계와 학급 분위기는 뒷전이며 오로지 더 좋은 입시결과만을 쫒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보다 학생들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어도 모자라는데, 학생이 아닌 학생의 점수에 더 관심을 주는 교사 집단이 학교폭력의 원인이 ‘가정환경’그리고 학생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임 회피와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학교폭력/폭력’을 근절시킬 수 있을까. ‘사회복지학자가 읽는 노자 도덕경’의 3장 ‘현자라고 떠받들지 않는 것이’ 중 한 구절이 나온다.
『현자라고 조금도 떠받들지 않는 것이, 백성을 경쟁하지 않게 하는 길이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 백성을 도둑 되지 않게 하는 길이며, 탐낼 만한 물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백성을 심란하지 않게 하는 길이다.』
여기서 ‘현자’라는 표현을 ‘성적이 우수한 자’ 혹은 ‘좋은 고등학교/대학교에 들어간 자’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수월하다. ‘과잉간섭’과 관련해서, 부모는 자녀가 부모자신이 ‘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히려 부모가 강요하는 ‘현자’는 자녀에게 맞지 않는 것이고 ‘독’이 될 수 있다. 또한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들 개개인을 보려고 하지 않고, 학생들의 점수만 보고 그들이 숭배하는 ‘현자 – 학생의 점수 혹은 좋은 입시결과’가 되도록 학생들에게 경쟁을 부추긴다. ‘도덕경’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런 행실은 오히려 청소년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다. 부모 혹은 교사는 자녀 혹은 학생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현자’를 강요하지 말고 학생이 건강하고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자기 입맛대로 자녀 혹은 학생을 앞에서 끌고 가다보면, 앞에서는 앞만 보고 있으니 잘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녀 혹은 학생은 지쳐있고 생기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녀와 학생을 위해서라도 부모와 교사는 그들이 생각하는 ‘현자’, 즉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3. 청소년 자살 그리고 앞으로
가끔 언론매체 혹은 SNS를 보면 청소년 자살 소식을 접한다. 많은 기사 중에 공부를 잘한 학생이 갑작스럽게 자살한 기사들이 있다. 공부도 잘하고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아이가 갑자기 자살을 하게 된 것일까.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전교에서 1-2등 하던 학생이 갑자기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들어보니, 2등을 계속하다보니 ‘부모’가 1등을 하라고 압력을 주었고 이후에 ‘1등’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그 학생은 ‘1등 했으니 됐지?’라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을 한 것이다. 듣기로는 다른 활동을 더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의 꿈을 무시한 채, 오로지 공부만 시켰고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교’에 보내려고만 했다. 앞에서 언급한 ‘과잉간섭’에 한 부류이다. ‘과잉간섭’이 우울로 나타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짐작컨대, 위 이야기의 학생은 부모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하고 우울증세가 심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경우에는 학생 개인에 문제가 없다. 주변 환경이 한 학생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해당 학생의 부모는 크게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를 한다고 죽은 학생이 돌아오지 않는다.
잘못된 ‘어른’들의 행동과 사고로 앞으로 밝은 내일을 꿈꿀 ‘학생 ; 청소년’이 위축되게 살아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천하의 모든 이가 자기에게 예쁜 것이
참으로 예쁘다고 알고 있지만,
달리 보면 이것이 미울 뿐이다.
좋은 것이 좋다고 알고 있지만,
달리 보면 이것이 좋지 않을 뿐이니,
가짐, 안가짐이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이 서로를 이루며,
긺과 짧음이 서로를 형성하고,
높음과 낮음이 서로를 지으며,
음과 성이 서로를 만들고,
앞과 뒤가 서로를 정해준다.
그러므로 성인은, 함 안 갖는 일을 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푼다.
만물이 이루어져도 참견하지 않으며,
만물을 낳아주고도 소유하지 않고,
보살펴주고도 의지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을 뿐이니 떠나지도 않는다.』
위의 구절은 ‘사회복지학자가 읽는 노자 도덕경’의 2장 ‘예쁜 것이 예쁘다고 알고 있지만’에 나온다. 소위 ‘어른(부모나 교사)’들은 자기가 좋고 올바르다고 생각한 것을 ‘청소년(자녀 혹은 학생)’도 좋고 이를 따랐으면 한다. 그러나 위 구절을 보면,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남에게는 싫어하는 음악일 수 있듯이,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 노자가 ‘성인은, 함 안 갖는 일을 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베푼다. 만물이 이루어져도 참견하지 않으며…’라는 말을 했겠는가. 일반적인 부모가 성인반영에 드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방향은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그러한 데로 자라나게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게 뒤에서 보조를 하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입장에서도 같다. 자기의 학생에게 무조건 공부를 해라라기 보단 학생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길을 갈 수 있게 뒤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학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편향적인 지원이 아닌 고른 지원이 필수일 것이다.
왜 ‘공부는 성공이다.’라는 말이 공식처럼 사용된 지는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아마도 한국사회가 발전을 하면서, 고등교육이 더 나은 삶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는 반세기 넘게 지속되다보니, 현재의 과잉간섭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한다.
앞에서 지속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청소년이 성장할 때,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되, 청소년 스스로가 결정하게 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간섭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첫째는 부모의 이상을 향해 자라난다고.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부모 역시 첫째 아이가 그들에게도 첫 번째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이 부모가 생각하는 ‘성공’으로 향해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자녀를 생각한다면, 그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국가 차원 아니 청소년기의 부모를 대상으로 학교나 특정 기관에서 청소년기의 자녀를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강연이나 프로그램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구체적으로 자녀에게 하는 행위 중 어떤 것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건지 제시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자녀의 진로 선택에 있어서, 부모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자녀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설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부모는 자녀의 진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않고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는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해당 진로와 직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을 프로그램을 통해 습득하고 그 정보를 자녀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보다 자녀와 부모 두 입장에서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교사의 입장에서도 비슷하다. 학생의 성적이 전부로 여기지 않으며, 해당 학생이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진심어린 관심을 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사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고 학생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Ⅲ. 마무리
청소년기는 100년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퍼센트도 안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성인이 되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청소년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확립해야 하지만, 주변 환경들 특히, 부모나 교사도 청소년에게 그에 맞는 대응을 해줘야 한다. 청소년들은 부정확한 정보를 얻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삶을 겪어본 어른들이 청소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을 해줘야 할 것이다.
‘도덕경’은 전 세계적으로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이다. 특히, 중국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따라왔지만, 생활 기반은 도덕경이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도덕경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청소년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방향을 정해주는 것을 보면 그렇다. 글에서 언급한 청소년 문제(학교폭력, 청소년 자살)들이 청소년이 겪는 모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급한 문제 외의 청소년 문제도 도덕경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승희. 2015. 사회복지학자가 읽는 노자 도덕경. 사람의 무늬.
김영신. 2008. 부모 양육태도와 내면아이의 상관관계성 및 치유방안 연구. 석사학위논문, 상명대학교.
한미혜. 2010. 원가족 부모의 부정적 양육태도가 성인초기 자녀의 친밀감 두려움에 미치는 영향: 수치심의 매개효고. 상담학연구. The Korea Journal of Counseling.
김신경 외 2명. 2014. 학교생활적응과 부모의 양육행동이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 부모 양육행동유형의 조절효과 검증. 청소년복지연구 제 16권. 육아정책연구소.
박효정. 2013.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학교문화 형성요인 분석 연구. 한국교육개발원.
김대군. 2013. 관계적 폭력과 소수자 배려윤리 – 학교폭력문제를 중심으로-. 경성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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