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모름을 아는 것이 최상이고, 자기 앎을 모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도 많다. 정확히는 지식을 많이 쌓았거나, 그렇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우물 밖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다.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새를 봐도 우물 밖의 광활한 세계는 보지 못한다. 그러나 이 똑똑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얼마나 미세하고 편협한지 깨닫지 못하고, 이를 끊임없이 자랑하려 든다. 스스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토론 수업 시간이었는데, 한 남학생이 생리공결제를 없애야 한다고 열띤 주장을 펼쳤다. 그는 제도로 인해 남성들이 느끼는 부조리함을 역설하며 역차별을 주장했고, 이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봤다던 생리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들을 늘어놓았다. 생리통을 포함한 월경증후군은 전부 인지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여성은 마음을 굳게 먹고 원하기만 한다면 흐르는 피도 막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학교는 남학교가 아니었던 고로, 그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반 가까이는 여성이었다. 당장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나부터가 여성이었다. 그도 눈이 달렸고 귀가 달렸으니 거기 앉아있는 사람들이 여성인 줄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대체 왜 현실에 있는 여성이 하는 말보다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온 정보가 믿음직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자궁이라도 갖고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는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이 자신의 앎을 확신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 그는 자신의 앎은커녕 자신의 모름도 모르고, 그래서 남의 앎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주 특이한 경우였던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앎을 너무나 믿은 나머지 앎의 한계와 모름의 광대함을 깨닫지 못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 국어 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는 문해력 부족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SNS에서 문해력 부족의 예시라고 화제가 된 글 중에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빌려줬다가 물건이 망가진 사람은 변상을 하겠다는 상대방에게 가격을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싼 것도 많던데 이건 왜 이렇게 비싸냐”라는 식으로 대꾸하였다. 이에 물건을 빌려줬던 사람은 “그럼 네 귀에 꽂힌 이어폰을 자르고 노브랜드를 사주면 되는 것이냐”고 맞받아쳤다는 이야기였다. 웃음거리가 된 것은 여기에 달린 글이었다. 뜬금없이 “노브랜드 이어폰은 잘 안 들린다. 환불도 안 해준다.”라는 말이 댓글로 달렸다. 댓글의 주인은 글씨를 읽을 줄도 알고 그 말이 하나하나 무슨 뜻인지도 알지만, 정작 글에서 뭘 말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 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려 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미세하고 편협한 경험을 지식이랍시고 전하고자 안달 나있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의 앎이 이렇게 옳고 대단하다고 자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나또한 짧은 지식을 포장하여 내밀고자 하는 욕을 좀처럼 없애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의식적으로나마 내가 모르는 것이 무한함을 되새기고 인간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닫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