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장에서 만난 노자
사회과학고전읽기 기말보고서
당구장에서 만난 노자
2015310432 경영학과 한주희
2개월 전에 쓴 중간고사 과제에서 나는 노자의 도덕경으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자기존중감을 높인 경험을 말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이 수업과 도덕경을 통해서 진심으로 내 내면을 보듬을 수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도 알고, 자신감도 되찾아 가는 중이다. 그 증거 중 하나로 나는 그 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작은 도전을 시도했었는데, 바로 아르바이트이다. 이전의 나는 자신감이 몹시도 부족해서 면접을 보러가겠다는 전화 한통 걸지 못하고 1년 이상을 고민만하며 벌벌 떨었었다. ‘나처럼 어벙하고 못생긴 애를 누가 써주겠어? 서비스직은 나에겐 사치지.’라고 생각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얼마 전에 용기 내어 도전한 첫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나는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도 무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말이다. 나중에 사장님께 여쭤보고 안 것이지만, 내가 뽑힌 이유는 인상이 좋아보여서라고 했다. 합격했다는 그 자체보다도, 나의 내면에 있는 밝은 모습을 알아봐주신 것에 훨씬 감사했고, 뛸 듯이 기뻤다. 그렇게 내가 일하게 된 가게는 당구장이다.
사회과학고전읽기 수업을 들을 때마다 느꼈던 것이지만, 노자는 현대사회의 어느 부분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 같다. 도덕경과 당구장은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당구 안에도 노자의 철학이 숨어있다.
당구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던 나도 2개월 간 매일같이 당구장으로 출근하다보니, 당구에 대해, 또 당구를 치는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또 사장님께 직접 당구를 배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당구를 배우기 전에는, 당구란 각을 잘 계산해서 현란한 기술로 점수를 얻는 묘기 같은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배워보니, 계산이니 기술이니 하는 것보다도 긴 막대기로 공을 치는 단순한 그 행동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소위 큐질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기본중의 기본이면서도 고수들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동작이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자연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공을 제대로 치기 위해서는 적당한 보폭, 다이와의 거리, 큐를 지지하는 손의 모양, 손과 공의 거리, 흔들리지 않는 백스윙, 팔꿈치의 각도, 시선처리, 허리의 각도, 공의 타점, 두께, 속도,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을 놓치지 않는 것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완벽해야만 한다. 무엇하나가 조금이라도 허술하면 바로 티가 날 수 밖에 없다. 공은 아주 정직하게 자기가 맞은 대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한 번의 공을 치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것을 신경 쓰면서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큐로 공을 부드럽게 밀듯이 치는 것이 관건인데, 초보자들은 여러 요소들에 신경을 쓰다 보면 팔이 뻣뻣하게 굳고, 눈을 부릅뜨게 되며, 공을 치는 순간에 기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런 와중에 힘을 빼고 공을 자연스레 밀어버리는 것은 진정으로 노련한 당구의 고수들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공 앞에서 딱딱해지는 초보자이다. 나의 당구 스승님은 자꾸만 나에게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라고 조언해주신다. 공을 완벽히 치겠다는 과욕이 오히려 내 공을 안 좋은 결과로 이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큐로 공을 치는 것이 노자의 철학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노자는 도덕경 전체에서 유연함과 질박함,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 궁극인 무위를 강조한다. 내가 공을 제대로 때려보겠다고 시선은 왼쪽 눈에 맞춰서, 무게중심은 왼발에, 팔꿈치는 직각으로, 큐는 25cm로 잡으려고 하는 것은 다 인위적인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러고 있는 나를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마치 로봇처럼 딱딱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교본에서 말하는 그대로 신경 쓰는데도 내 공은 내 맘과 다른 곳으로 굴러가기만 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인위의 부작용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려하면 할수록, 의도한 것과 반대로 흘러가고 그것이 결국 자신을 더욱 옥죄는 틀이 될 것이다.
반면 나와는 대조적으로 당구의 고수인 사장님은 얼핏 보면 대충 아무렇게나 공을 치는 것 같아도, 매우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그러나 사실은 완벽하게 공을 굴리신다. 억지로 하려하지 않는 무위가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뭔가를 하려 하지 않는 것’ 즉 당구에서의 무위의 경지가 이것일 것이다.
나는 당구공을 큐대로 치는 행동에서 또 다른 노자의 철학도 떠올려봤는데, 큐대를 지도자로, 당구공을 백성으로 생각하면 지도자의 윤리로써의 도덕경이 꼭 들어맞는다.
당구공은 큐대가 치는 대로 굴러간다. 공의 반을 치면 정확히 45도 방향으로 굴러가고, 공의 밑 부분을 치면 역회전을 하며 뒤로 굴러오고, 큐로 입사각을 조절하면 정확히 같은 반사각으로 공이 굴러간다. 이건 큐가 잘해서도 공이 잘해서도 아닌 물리학적인 자연섭리이다. 큐는 그러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공의 뒤에서 공이 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큐가 있는 것조차 못 느끼게 부드럽게 밀어주면서 말이다. 큐가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며 공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게 때려버리면 공은 오히려 의도한 방향대로 굴러가지 않고 이리저리 휘며 심지어는 다이 밖으로 껑충 튀어나가기도 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역할도 이 큐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는 백성들이 자연스럽고 순박한 모습을 간직한 채로 자연의 도에 따라 질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줘야하는 존재다. 노자의 말에 따르면 최고의 지도자는 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하는 지도자이다. 그 때문에 지도자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백성을 대해야 하고, 무력과 병기를 멀리해야한다. 큐가 뒤에서 공을 세게 때려버리는 것은 무력을 좋아해서 백성에게 공포감을 주는 지도자와 같을 것이다. 백성이 농사를 지어 먹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지도자 인 것이다. 이런 지도자는 분명 민심의 반발을 사서,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지도 못할 것이며, 백성이 다 떠나버릴 것이고, 자신 또한 고통 받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혹자는 당구와 노자의 도덕경을 연결한 것이 억지 해석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당구도 도덕경도 이제 막 공부하는 단계이니 잘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구와 도덕경이 아주 닮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당구장에 오는 손님들 중 당구를 정말 오래치신, 당구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은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당구 안에는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당구를 정말 잘 아는 분들이 말씀 하시는 것이니, 그분들의 긴 당구인생의 깊은 깨달음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는 말일 것이다. 만약 당구 안에 정말로 인생이 담겨있다면, 그것이 노자의 도덕경과 닮지 않았을 리 없다. 도덕경은 5000자 밖에 안 되는 짧은 글에 인생을 전부 담고 있다. 그렇기에 2500년이 지난 현대 사회에서도 내가 이렇게 도덕경을 배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경 안에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고, 지금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번 학기에 노자를 접하고, 크고 작은 변화를 겪은 것처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자의 도덕경을 알고, 함께 빡빡한 현대 사회를 더욱 유연하고 행복하게 가꾸어 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