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國寡民,
무명무욕의 공동체
나는
대학교 입학할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민주주의는 정착되어가는데 왜 여전히
사람들은 노예처럼 과로에 시달려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쓰고도 남을 부는 한쪽에 쏠려 있으며, 우리는 왜 평생 벌어도 조그만 내 집한켠 갖기도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전공을 선택할 때 주저함없이 사회학을 선택했다.
지난 3년 반의 대학생활은
이런 나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수업을 고르거나 팀플과 개인과제를 준비할 때 어김없이 나의
궁금증을 가지고 주제를 설정해서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북스터디도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들과 책을 읽어갔다. 그런 과정의 연속선
상에 이 수업도 있었다. 사회과학고전읽기라는 제목에 이끌려 수업계획서를 살펴보게 되었고, 사회과학고전이 아닌 도덕경을 읽는다는 것에 조금 의아했음에도 흥미가 생겨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고전 인문학인줄로만 알았던 이 도덕경에서 지금껏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사회의 문제의식과 그 대안들에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느끼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제의 근원이 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소외현상일 것이다. 인간은 노동과
쉼, 여러 생명활동들이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가면서 삶의 많은 부분들이 그 존재의 외부로 나가버리는 소외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소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주인이 자기자신이 되지 못하고 자본가가 된다. 노동의 과정도 생산품도 자기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소외가
일어나는 것은 단지 노동뿐만이 아니다. 사실 인간의 한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상품화된
시장으로 소외되어 나아갔다. 이제는 의,식,주 모두를 그리고 출산, 육아, 교육
모두가 시장에 종속되었다. 심지어는 결혼까지도 시장에서 이루어진다.
노자는
이 만물의 어미를 이름이라고 말한다. 더 풍요로운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탐욕은 이름붙이기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제 철저히 소외된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과의 어우러짐은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단지 노동을 팔아 번 돈으로 시장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곳에 밀집해서 살아가면서도 서로의 얼굴과 이름조차 모른 채 홀로 살아가도 아무 지장이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소외현상, 도시화, 시장에로의 종속 등 일련의 현상에서
현대 사회문제의 근원을 찾는다. 이 사회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관계가 소멸된 곳에서는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름과 싶음을 추구하려는 성향은 그래서
더 무분별하게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사회로 제시한 것이다. 나는 노자의 소국과민을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무명무욕의 사상을
전개하는 가운데 그 절정에서 나오는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단지 사람을 적게 하고 나라 크기를 줄이는게
이상사회라는 것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그런 사회 속에서 누리는 무명무욕의 삶이 이상사회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할 때는 어떤 제도가 이 사회를 고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면, 이 도덕경을 읽은 지금은 오히려 무위로 돌아가야하는 것이 최선임을 알게 되었다. 온갖 제도를 만들어서 어떻게든 풍요로우면서도 평등한 삶을 만들려하기 보다는,
아예 모두가 다같이 경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나라를 살리는 일은, 백성을 위하는 길은 백성들이 무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무위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나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착취에 기반한 일이다. 누군가의 잉여가치를 노동의 몫으로 온전히 돌려주지 않고 자본으로 축적해야만
그 위에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경제는 성장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은 더욱 발전할수록 불평등은
커져만 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신화에
갇혀서, 경제성장을 포기할 줄을 모른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으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일단 경제성장을 전제로 이야기한다. 지도자가 해야할 일은 우리가 더 이상 경제성장에 목맬
필요없다고 다독여주는 일이다. 분명 이는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기술의
발전을 더디게 하겠지만, 또 이것은 분명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시장에 의존하면서 돈으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서로를 도우면서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도덕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떠올릴 때가 많다. 성경에서도 이런
이름과 싶음을 경계한다. 이를 성경에서는 ‘죄’라고 부르고, 이 죄로부터 우리를 지키기위해 교회를 이루어살게 한다.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주고 죄로부터 지켜준다. 이름과 싶음을 따라
사는 삶을, 성경은 죄의 노예가 되는 삶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도덕경을 읽으면서 무명무욕의 삶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삶을 다시금 묵상하고 다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