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동안 사회과학고전읽기 수업을 통해서 도덕경 한 권을 읽었다. 이
책은 첫 장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다루기 시작해서 뒷부분에서는 위정자를 위한 조언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쭉 읽으면서 가장 자주 든 생각은 정말로 이 책이 자연의 이치에 잘 맞는다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피해야 할 점’인 이름과 그에 따른 싶음은
현대 사회에서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도덕경
44장에서는 이름과 몸, 몸과 돈의 우선순위와 만족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44장의 시작에서는 이름과 몸 중에 무엇이 참되고,
몸과 돈 중에 어떤 것이 소중한지에 대한 물음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 질문을 지금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서민들에게 던진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 대답으로는 몸이 우선한다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일상에 치이며 살아간다고 한다. 많은 직장인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한다. 미성년자인 학생들 또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학교, 학원에서
공부한다.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걱정한다. 그들이 이렇게 혹독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거의 한 초점에 수렴한다. 이름과
돈을 위해서이다.
어린
학생들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 혹은 11시까지 학교 혹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들에게 지금
공부하는 목적을 물으면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대답을
한다. 대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한 직후부터 취업 걱정을 시작한다. 학점을
유지하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학교를 다닌다.
그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으면 아마 ‘번듯한’ 직장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인들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한다.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결국
삶이 흘러가는 과정이 이름과 돈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명문대라는 이름,
그것이 만들어내는 싶음이 아이들을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게 만든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 일이 전혀 즐겁지 않더라도 일을 해야만 한다. 실제의 삶에서 몸은 이름과 돈 그
너머에 멀찍이 뒤처져 있다.
나는
현재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나는 그 곳의 아이들이 두 부류로 분류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로는 공부가 하기 싫다고 울상을 지으면서도 꾸역꾸역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다. 그러면서도 “공부해야 대학에 가죠!”라고
한다. 그들은 그 싫어하는 공부를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현재 대학생으로서 하는 고민이 눈앞에 겹쳐지면서 심정이 복잡해진다.
두
번째로는 공부를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빨리 하원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떠들고, 시험을 보면
정말 정성스럽게 컨닝을 한다. 저렇게 힘들게 눈치를 보면서 그만큼 티나게 컨닝을 할 거라면 차라리 공부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는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누가 학원에 다니기를 원했길래 학원을
다니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이 학원에 온 건 본인의 싶음일까, 부모님의 싶음일까.
아이들이
그렇게 돈과 시간을 들여 들어온 대학에서는 배움의 의미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요즘 대학교들 중에는
‘공무원 사관학교’를 내세우는 학교들도 있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과정이 되어가고 있다는 명백한 지표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취업하면 돈을 얻게 된다. 그 돈과 함께 젊음도 흐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 책의 내용대로 한국 사회가 흘러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 본다. 정치인들이
공적인 싶음을 따르고 사적인 싶음은 배제하며, 무명무욕의 가치를 알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 삶에 꼭 필요한 요소를 재물로 갖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가질 수 있는 사회 말이다. 아마 이런 사회가 갖춰진다면 위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현재의 삶의 모습이 결국 나라에 크나큰 병폐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