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위
나는 저번년도에 휴학했었다. 농구하다 전방십자 인대가 완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일 년을 한량처럼 보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강박하고 옥죄는 버릇이 많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내가 처한 현실이 남한테 숨길 것도 없는 무생산성의 극치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의 나의 삶은 늘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했다. 공부를 할 때는 누가 물어보면 “어떤 파트의 공부를 이렇게 하고 있는데 여기를 이만큼 공부했고 여기는 잘 모르겠어서 이렇게 공부할 것이다.”와 같은 나의 미래를 촘촘히 계획하고 있어야 했다. 쉴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뭘 하면서 그래서 어떤 효과를 얻고 다시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선생님과 부모님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나는 뒤처지고 가치가 없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며 낙오자가 될 것이다.’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물론 그 불안감은 경쟁사회에서 어렸을 때부터 주입되어 온 사고였다. 이렇게 일분일초가 지옥처럼 나에게 다가왔고 이런 불안감 강박감은 우리나라의 많은 수험생들 직장인들이 느끼는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휴학을 하며 정말 쓰레기처럼 살았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거르고 컴퓨터를 켜서 게임이나 만화를 보며 하루를 보내다 밤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7개월을 보냈다. 처음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내 적응이 되었고 더 나아가 남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존재로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그 자유로움에 취했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 어떤 생산성과 시간의 촉박함으로부터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벗어나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런 마음 즉, ‘느긋하고, 쫒기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이번 학기에 복학을 했다. 그리고 1학년 때부터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던 동아리의 회장을 덜컥 맡게 되었다. 나의 지옥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20년을 주어진 의무감에 살다가 1년 동안 해방의 감각을 깨달았다고 자부한 이 천둥벌거숭이는 누군가의 리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몰랐다. 나는 회장을 맡았을 때 그 사태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아 같이 놀고 화목하게 지내면 되겠네!!, 나는 뭐 권위의식도 없으니까 수업에서 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만물을 자연스럽게 운동하게 하는 그런 최상의 리더가 될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순진한 생각으로 임했다.
그러나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란 자연의 도, 즉 자연의 위이다. 그것은 상황에 유연하게 처하며 그 변화의 묘맥을 잘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기에 사람들이 그 자연스러움에 작용이 있는지를 눈치 못 챈다는 의미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벌리며 누군가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무책임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무위의 리더가 되겠다고 다짐했음에도 고정된 원칙을 세우고 딱딱한 마음가짐으로 사람과 일을 대하는 실수를 벌였다. 즉 나는 최소한의 일을 하고 나머지는 유능한 사람에게 맡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의 총책임자인 내가 가만히 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은 내가 훌륭해서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니 그것을 수습하는 양태였다.
나는 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다. ‘내가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신입생도 많이 데려왔으니까 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에게 오는 피드백들을 잔소리로 생각하고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게 4~5월에 주점과 같은 큰 행사를 진행시키는 와중에 쌓여있던 문제들이 터졌고 결국 그 원망들과 잘못된 결과들은 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로 다가왔다.
처음에 나는 그 사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그렇게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는 정말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상황파악을 하지 않고 머릿속에서만 일을 진행시키고 늦은 행동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점이었다.
도덕경 8장에 따르면 최고의 지도자는 물과 같다는 말이 나온다. 물과 같은 지도자는 머물 때는 머물 곳에 머물고, 수용을 잘하며, 어질게 대하고, 말할 때는 신뢰감을 주고, 정사를 무리하지 않게 행하며, 일을 원활하게 하고, 움직이기 좋은 때를 잘 선택한다. 그래서 만물과 다투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 노자에 따르면 이 세상에 상대를 어떤 가치체계나 의무체계로 옭아매어 강요할 주체나 실체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 순간순간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 어떤 것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된 것이 없다. 사람도 가치도 사물도 일도 고정된 것이 없다. 그저 그 모든 것을 변하게 도의 작용만이 계속해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어떤 것을 고정시키는 이름이나 어떤 것을 실재한다고 여기게 하는 가치체계들(이쁨, 똑똑함)을 헛된 것으로 여겼다. 고로 유능한 지도자란 또한 현명한 사람이란 이런 도의 속성을 깨닫고 그 도와 함께 하는 자이다.
따라서 물과 같은 사람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모든 일에 알맞게 대처할 수 있는 연유는 물은 주체 혹은 ‘나’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비판도 비난도 듣고 넘기고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취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다. 그러나 ‘나’를 고집하면 누가 비판이나 비난을 할 시 ‘감히 너가!!, 넌 내가 이걸 한 건 아니?’와 같이 싸우게 되고 변명하게 된다. 그렇게 살면 백년을 살아도 잘못이 잘못임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를 바꾸는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자 연결다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앎이란 쌓아서 벽이 되고 고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가벼워지고 나의 본체인 도와 가까워 지는 것이다.
이에 도덕경 71장에서 “성인이 진정으로 잘못 짓지 않는 것은 항상 잘못을 잘못으로 여겨서 아무런 잘못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라 한다. 그러나 이는 그냥 단순한 자기 잘못인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듣는 것은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에 ‘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겉으로 뉘우치는 빛을 하고 슬퍼해도 결국 그 본질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므로 실수를 다시 저지른다. 딱 나의 모습이었다. 즉 잘못을 잘못으로 여긴다는 의미는 고집할 내가 없음을 알고 내가 모르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실수를 번복하지 않는 가장 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지만 가장 좋은, 무위의 위인 것이다.
나는 나를 고집했기에 무위를 표방했음에도 내 안의 원칙을 세워 사람과 다투었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으며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남의 염려스러운 이야기에 각을 세우며 어질게 대하지 못했고 움직일 때를 파악하지 못하여 결국 남의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진정한 무위의 위로서 행동한다면 나는 고집할 나가 없을 깊이 알기에 그런 마음가짐이 유연하고 상황에 적절하게 처하는 행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무위의 위란 그 상황과 합일하고 사람과 합일하고 도와 합일하여 억지 없이 고집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필요한, 중요한 요소들을 다 충족시키고도 전혀 힘들이지 않아 평온하고 가벼운 그런 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