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보고자 하는 대상의 개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수업을 듣기 전이라면 무심코 넘겼을 이 짧은 문장은, 노자의 사상에 한발 다가간 지금이라면, 회의를 제기하기에 충분한 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보체계에 자신이 이름 붙인 것을 넣는 것과 같다. 즉, 명을 집어넣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원 화성을 보는 상황에서 그 화성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사실 등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화성에 대하여 “조선 때 지어졌고 거중기를 통해 만든 건축물”이라는 명을 머릿속에 넣게 된다. 따라서 화성을 볼 때는 항상 자신이 아는 그대로 볼 것이고 자신이 아는 대로 정의 지을 것이다. 반면 화성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화성을 볼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남들과는 다른 점을 찾아내거나 상상력을 발휘하여 건축물을 바라볼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화성에 뚫려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포를 쏘는 병사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그 구멍을 통해 소통하는 사람들의 모습 등과 같은 자신만의 창의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무엇일까? 교수님은 아는 만큼 보인다의 이면에는 아는 만큼 볼 수 없다는 뜻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나로 하여금 그 짧은 문장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던 것 같다.
도덕경의 첫 장의 첫 글에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길이 바른길이라도 참 길이 아니고 이름이 바른 이름이라도 참 이름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은 사람들은 만물에 대한 의미를 자신들의 머리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리려는 강한 싶음을 갖게 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 구절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본다면, 애석하게도 나의 삶은 명에 지배받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에 목매여 살아왔으며, 항상 남이 나보다 잘할까 두려워 노심초사 했고 눈치를 보며 그들과 경쟁을 하기에만 바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 지난 삶은 명이 나라는 것을 규정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명의 틀 안에서 살아왔던 것과 다름없었던 것 같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명에 구속되어 살아왔던 위와 같은 나의 지난 경험은 내가 그토록 고민하고 생각해보았던 ‘아는만큼 보인다’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과거에 나는 항상 무궁무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에 대해 ‘교수님이 시험에 나온다는’ 말 한마디에 이를 외워야 문제라는 명을 붙이기도 했고, 중요한 문제라는 명을 붙이기도 했다. 즉, 시험에 나온다는 것을 안 이상 나는 더 이상 그 대상에 대해 자신의 또 다른 생각이나 창의력을 펼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진정한 앎과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시험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시험에서 그 문제를 맞히고, 좋은 점수를 받을 수는 있었겠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때와 달리 도덕경을 읽으며 하루하루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는 나는 이러한 나의 과거에 비추어 아는 만큼 보인다의 비슷한 문장은 어찌 보면 우물 안의 개구리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개구리라면,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나를 제한하는 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수님이 말씀하신 아는 만큼 볼 수 없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