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학생이 읽은 노자
2012313217 사회학과 차현승
도덕경을 배우며, 나는 노자가 추구하는 삶과 상반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한 장 한 장 배울 때마다 수많은 의문점들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 삶 속에 깊이 들어와있던 이름(名)들과 그에 대한 나의 싶음(欲)에 대해 짚어보고, 뉘우치기도 변명하기도 했고 노자의 말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식으로 재해석 해버리기도 했다. 본 에세이를 통해 그 동안 해왔던 생각의 티끌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노자는 ‘이름안가짐이 천지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는 즉 하늘과 땅은 애초에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고, 따라서 그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름을 짓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인간은 대상에 이름을 붙여서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의미를 뚜렷이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상에 대해 뚜렷이 ‘가치판단’을 함으로써 ‘싶음’을 만들어낸다. 노자는 모든 이름을 경계한 것이 아니라 강함 싶음을 만들어내는 이름을 경계하였다. 내 안에는 우리 사회의 병폐들-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입시경쟁, 외모지상주의, 학벌주의 가부장제 등-의 찌꺼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것 같다. 위와 같은 노자 사상의 큰 틀인 '무명무욕'은 실로 내가 가지고 있던 찌꺼기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보도록 했다.
하나. 나를 집착에 빠지게 했던 이름들.
나는 지난 삶 속에서 끊임없다 ‘좋다’고 일컬어지는 ‘이름’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물론 태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서히,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바뀌어 온 듯하다. 초등학교 때의 나는 그냥 공부를 했다. 대학을 잘 가야겠다거나 고등학교를 잘 가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시험점수를 잘 받으면 부모님이 기뻐했고, 학교에서는 상을 받는 등 나에게는 어느새 ‘공부 잘 하는 아이’라는 암묵적인 타이틀과 기대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져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이런 성장과정을 통해서 공부하는 것 자체와 시험점수 잘 받는 것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특목고입시를 시작하며 내게는 강한 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secret> 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는데 이 책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며 나의 싶음을 부추겼다. 나는 매일 밤마다 내가 외고에 합격한 모습을 상상하며 나의 욕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하고 말았다. 이 때 떨어졌어야 했다. 욕에 집착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잘못된 경험으로, 나는 대학입시 때 이를 반복하여 많은 것을 잃었다. 고3 때 소중한 가족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건강마저 챙기지 못해 고생했다.
다행히도 그 때 했던 고생 덕분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스스로 대학이름에 대한 집착을 놓으려 했던 것 같다. 대학에 오고 나서 입시와 각종 줄세우기에 질렸던 나는 의도적으로 의미없는 점수따기를 멈추었다. 대학(大學)인 만큼, 단순 암기와 문제풀기 능력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큰 배움을 얻고 싶었다. 2년 반 간의 배움이자 방황의 시간이 지나고서 행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내가 세상을 더 좋게 바꿔보겠어!’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오만한 생각이어서 부끄럽다. 그리고 그 결정에는 분명 행시합격자라는 이름에 대한 나의 욕망과 부모님의 싶음 또한 투영되었던 것 같다.
불행히도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나는 무럭무럭 집착을 키웠다. 욕심은 시험합격에 있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고시촌에서 만난 사람들이 일명 SKY대학을 나온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버린 줄 알았던 ‘대학이름’에 대한 자격지심을 느꼈다. 또한 예쁜 친구들의 모습이 페이스북에 올라올 때마다 추레한 나의 모습과 비교하며 스스로 자존감을 갉아내었다. 대학에 오고 나서 잠시 명(名)에 연연하지 않는 유연한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명에 큰 가치를 부여하는 환경에 있다 보니 모든 게 도루묵이 되었다. 나는 어느새 다시금 경주마가 되어있었다. 뒤처지면 안된다는 불안감에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그 것을 멈추고 싶었다. 아니 그냥, 그 경기장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고3 수능 다음날 자살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경기장을 뛰쳐나간 것이었을까. 그 친구에게는 대입만이 경기장이었던 게 아니라 인생이 경기장이었을까. 2011년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 씨도 떠올랐다. 그녀는 거대한 상아탑에 균열이 시작되었노라 대자보를 붙였었다.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도 같지만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는 아직은 굳건한 것만 같다. 경기장, 상아탑 같은 인위적인 것들은 도대체 언제쯤 사라질까.
나는 두 번의 1차 시험에 떨어졌다. 결국 이름에 대한 집착에 의해서 피폐해진 나는 행정고시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취업이라는 새로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고 이 안에서도 경주는 계속 되고 있다. 눈을 낮추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직장은 돈도 못벌면서 복지도 안 좋다고들 한다. 특히 여자는 임신 및 출산하면 그 길로 퇴직이란다. ‘좋은’ 직장이 아니라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은 명이 아니라 복의 문제일 것이다. 아니면 '괜찮은' 직장조차 욕심인 것일까? 헷갈린다. 청년들은 취업이 안 된다고 아우성, 기업들은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누가, 어디서부터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어쨌든 나는 행시를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세상을 보니 주변에는 YOLO족, 프리터 족 등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또한 욕심이 되지 않는 걸 경계해야겠지만) 어쩌면 이런 답답한 세상에 회의를 느끼고 균열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경기장이 아니라 푸른 초원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름이라는 것이 허망한 거라는 걸 알아차리고, 내가 살아있기에 불안함을 느끼는구나하며 감사할 수 있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있어 다행이다. 내가 살아오며 축적된 마음의 찌꺼기는 아직 남아있지만 언젠가는 이것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둘. 노자 철학과 페미니즘, 결국엔 맞닿아있는 어떤 지점
작년즈음부터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들 중 한 요소는 페미니즘이다. 내가 여자이기에 겪었던 두루뭉술하지만 불쾌했던 사건들이 성별권력관계에 의해서 명확하게 설명이 되었고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경험들을 공유하는 장이 마련되어서 나는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페미니즘은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요’함을 돕는다. 도덕경을 배우며 가장 의문이 생겼던 부분은 노자 입장에서는 페미니즘 역시 어떤 현상을 사람들의 이해와 싶음으로 판단한 언어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목이었다. 이 ‘요’함으로 인하여 노자철학과 페미니즘이 충돌하는 듯하자, 둘 다로부터 위안을 얻고 공감을 했던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역시 사용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제목은 내용의 핵심을 요하게 짚는 것이므로 본 글의 제목에 언급하였다.)
여성주의 수업 시간,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페미니즘은 다양성 그 자체에요.”라는 것이었다. 요즘, 페미니스트에 대해서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끼기도 하고 거부감을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페미X’라는 말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뭉뚱그려 공격한다. 하지만 내가 페미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있기에 우리의 소리가 의미 있는 언어가 되어 사회 변화에 반영되기 때문이었다. 남아선호사상으로 넉넉지 않은 살림에 딸을 셋이나 낳으셨으면서도 할머니께 구박받는 어머니, 지하철에서 은근슬쩍 허벅지를 만지는 손, 엘리베이터를 따라 들어온 바바리맨에 경악한 앞집 언니의 이야기... 이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하면 재치 있게 혹은 제대로 대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나에게 여성주의는 명쾌한 답을 주는 듯했다. 아마 이렇게 해서 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면 노자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노자가 경계하는 것은 과한 날카로움일 것이다.
분명 최근 다시 일어난 페미는 단단하다. 나는 이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주류에서 다른 흐름을 찾는 움직임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하고 나자, 그리고 그 날카로움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식을 바꿈으로써 조금씩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자 페미니즘은 편안하게 다가왔다. 노자는 ‘단련시켜 예리한 것은 오래 보존 못’한다고 했다. 다행인 것은,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우리 모두는 변화무쌍하므로 한가지 주장만 고집해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나도 한 때는 내 안의 식에 갇혀서 “저런 단단한 페미는 진짜가 아니야”라고 페미니스트를 재단해냈다. 남-여의 분리를 통한 재단 뿐 아니라 페미와 비페미에 대한 분류까지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날이 무뎌졌는지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뭐라고 페미니스트를 구분 짓나. 나도 어떤 이들이 보면 날 선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리고 또 페미니스트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떠랴. 중요한 건 그런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세상, 성별 때문에 차별받고 불행해하지 않는 세상으로 가는 것 아닌가. 어쩌면 정말 ‘여성주의’라는 말 안에 갇혀서 여성주의가 가리키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힘들어 했던 시기를 겪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노자철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처럼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화제가 되어서 칭찬을 받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냥 살기 좋은, 자연스러운 사회로 가기 위한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너무나도 다양해서 ‘요’해진다기보다는 ‘묘’에 가까워졌던 것이 내가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다. 노자가 경계한 것은 ‘요’와 날카로운 모습이지 남성중심적인 싶음을 해체하고자 하는 건 오히려 반겼을 것이다. 물론 여성들이 지나치게 싶음을 추구하는 것은 반대했을 것 같다. 결국 노자라면 페미니즘으로 세상이 남녀대립구도가 되며 싶음으로 가득 차는 것은 경계했을지라도, 페미니즘이 가리키고 있는 달 그 자체는 싫어하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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