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노자. 가시나무에서 풀무와 피리로
2013314568
경영학과 홍석훈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처음 본 곳은 군대였다.
갓 들어온 이등병이 개인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동기생활관이 아닌 선임들과 쓰는 생활관이었기 때문에 개인시간이지만 전화, 컴퓨터, tv는 물론 편히 낮잠도 자지 못했다. 처음에는 멀뚱히 시간만 죽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주변의 환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군대에는 진중문고라는 이름으로 생각보다 책이 많이 들어와 있는 것에 놀랐다. 어렸을 적엔 책을 꽤나 좋아했었는데 수험공부에 찌든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면서 수험서 외에 책들은 관심도 없고 읽지도 않았었다. 그나마 책을 볼 때는 눈치가 덜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생때 시간이 없다는 변명으로 책을 놓았었지만 시간이 많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에도 책에 관심이 없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진중문고의 책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대로 장르를 불문하고 이것저것 읽었다. 그렇게 우연히 읽게된 책중 하나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마치 시로 쓰여진 소설을 본 느낌이었고, 다른 느낌의 성경책을 보는 기분이었다. 굉장히 많은 비유와 함축이 들어있었다. 읽기 힘들었지만 그에 비례하게 나를 계속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내가 느낀 이 책의 핵심사상이자, 나를 계속 끌여 들였던 내가 느꼈던 니체의 사상은 파괴자였다. 세상 모든 도덕, 법을 파괴하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새로운 법으로 새우라는 것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 내내 하라는것만 열심히 하고 ‘나’로 살지 않았던 나에게 너무 충격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상에 사로잡혀서, 휴가를 나가서 니체의 다른 책들도 많이 사서 보고, 니체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까지 모두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빠져들었고 거기에 사회와는 다른 군대생활을 겪으면서 그러한 니체의 사상은 내 마음 깊은곳에 박혔고, 차라투스트라 역시 제일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제대를 하고나서도 여전히 기존의 모든 도덕을 무시하고 직접 경험하고, 생각함으로써 도덕을, 선과 악을 내가 만들어서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그즈음 한 여자를 만났었다. 해외여행에서 만난 그녀는 서울에서는 너무 먼 전라남도 순천에 산다고 했다.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는 한국에 와서도 연락을 주고받고, 서로 왕래하면서 교제를 하게 되었고, 나는 학교에 복학을 했다. 그녀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다시 학생이되었다. 그녀는 순천에서 자랐고 나는 서울에서 자랐다. 집안사정도 많이 달랐다. 자주 만날수도 없었고, 서로 자라온 환경과 지금의 처지 모두 달랐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시나무였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았다. 빈자리가 없이,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과 도덕이라는 잣대가 그녀보다 더 중요했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녀가 미웠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싸움이 잦아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너무나 잘해줬던 그녀였지만, 그당시에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게 싫었고 1년을 만났지만 많은 다툼 끝에 상처만 주고 헤어지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건 하나도 없고, 그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었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학기에 접어들어 교양 수업시간에 이 책 ‘사회복지학자가 읽은 노자, 도덕경’을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윤리를 배웠지만 노자에 대해서 깊게 배워본적도, 노자의 책을 읽어본적도 없었다. 그래서 배울수록 새로웠고, 정말 내가 생각했던, 좋아했던 니체와 반대된다는 것을 느꼈다. 노자는 니체와 달리 ‘이름 갖지 않음’을 중요시한다. 무명하면 무욕해진다고 했다. 모든 것에 새롭게 이름붙이기에 급급했던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전혀 억지스럽지도, 마음에 안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많은 유욕과 유명을 경험하고, 바랬던 처지였기 때문에 무명과 무욕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5장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의 구절은 정말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않고, 만물을 풀과 개로 여긴다고 했다. 하늘과 땅의 텅 빈 사이가 풀무나 피리와 같은 것일까라고 물었다. 비어 있어도 졸아들지 않고, 움직이면 무언가 더욱 많이 나온다고 했으며, 말을 많이하면 자주 궁해지니 텅 빈 가운데를 고수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거대한 자연도 하늘과 땅을 비어두어서 만물을 키웠는데 작은 존재인 나는 나의 작은 마음도 비우지 못하여 남을 상처주고 떠나보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교수님이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려는 사람은 모든 기준을 그곳에 두고 좋음, 아니면 나쁨의 두 측면으로 모든 것을 나누려 한다고 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내 마음속에 항상 기준을 두고 모든 것을 둘로 나누려 들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항상 분쟁이 생기고 마음속에 화가 많았었다. 풀무와 피리는 비어있음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나에게도 마음속에 이름 갖지 않음, 즉 빈 공간이 필요하다.
수업이 끝나고 문득 그 때가 떠올랐다. 내 마음속에 쉴곳을 찾았지만 빽빽하게 자라난 가시나무에 상처만 받고 떠나갔던 그녀가 떠올랐다. 군대에서 본 책이 니체가 아니라 노자였다면 달랐었을까? 장담은 못하겠다. 오히려 니체를 통해 유욕 유명을 추구했었기 때문에 노자의 사상이 더깊게 다가 온 것일수도 있다.
지금의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도 아직 많은 다툼을 한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노자의 책 도덕경을 떠올린다. 화만 가득했던 마음이 사그라들고, 차분해지면서 먼저 사과를 하고, 서로의 입장을 말한다. 서로의 가시나무에서 벗어나 풀무와 피리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