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함안가짐'을 향하여>
글로벌경제학과 2014311194 서세희
사회과학고전읽기 수업을 들으며 육 개월쯤 전에 만나던 전 남자친구 생각이 참 많이 났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동창생이었던 그 친구와는 수학능력시험을 막 치른 뒤부터 만났다. 그와 만나는 동안 그는 나에게 최선을 다했다. 나에게 모든 관심과 애정을 쏟았으며,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난 시간이 지날수록 그걸 너무나 당연시 여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날 떠났다.
이 수업을 듣기 전의 나는 그가 떠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예쁘고 성격도 좋은, 그만을 바라보는 내가 뭐가 어때서 날 떠난 걸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그를 붙잡았다. 행여 내가 더 예뻐지면 그가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운동을 시작하고 고강도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끼니를 굶으며 내 건강을 헤쳐가면서 내가 생각하는 ‘미’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업을 들으며,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강요했던 모든 언행들, 그리고 그와 헤어진 후 했던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 나의 ‘함가짐’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연인’에게 기대하는 ‘싶음’을 채우기 위해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강요했었다. 마음으로 그의 본성을 이해하려기보다는, 억지로 그를 나라는 틀에 끼워 맞추려고 했었다. 이러한 나의 ‘명’과 ‘욕’이 그 친구를 얽맸으며, 그를 지치게 했던 것 같다.
그와 헤어진 후의 나 역시 ‘이름가짐’과 ‘싶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자신을 예쁘고 착하고 성격 좋은 ‘최고의 여자친구’로 이름 붙이고, 이러한 ‘이름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싶음’을 채우기 위해 내 기준의 ‘예쁨’과 ‘착함’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노자에 따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모든 것에 대한 욕구는 우리가 이름 붙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최고의 여자친구’라는 ‘명’이 없다면, 예뻐지거나 착해지려는 ‘욕’ 또한 사라진 것이다. 더 나아가, 노자를 알게 되기 전의 나는 내 기준의 ‘예쁨’과 ‘착함’이 참된 예쁨과 착함이라 여겼었다. 살을 빼야 예쁘다는 내가 정해둔 미적 기준에 갇혀 건강을 돌보지 않으며 살을 빼기 위해 굶기를 반복하며 나에게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나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의 ‘함가짐’을 위해 내 자신을 가꿔왔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를 알게 된 후, 이러한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름을 붙임에 따라 생각이 형성되고, 그 생각이 욕구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함가짐’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명’과 ‘욕’을 통한 ‘함가짐’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함안가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명과 욕에 따른 것들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만일 내가 노자의 도덕경을 조금 더 빨리 접했더라면, 그 친구와의 관계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드는 내 자신을 보며, 나는 아직 노자가 말하는 ‘무명’과 ‘무욕’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을 인지한다. 나와 헤어진 순간, 그는 이미 조금이라도 변했을 텐데, 나는 아직도 예전의 그에게 얽매여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함안가짐’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남은 학기 동안 도덕경을 읽으며 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열심히 수련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