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시간을 사는 사람’, 고등학교 동문들은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루에 남들보다 많은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전교회장과 방송부장을 맡으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저를 동문들은 대단하다고 치켜세웠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많은 일을 도맡아했던 이유는 무언가 일을 하지 않으면 뒤쳐질지 모른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기인하였습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지라도 이것을 견뎌내면 제 능력이 향상될 거라는 생각이 저를 워크홀릭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청년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자기계발’의 프레임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일을 하라 명령하지는 않지만 경쟁에서 뒤쳐질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을 일을 찾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마칩니다. 그 일이 마무리 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과제가 갈무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그 일을 마치는 순간에도 그들의 상상속의 경쟁자들은 다른 일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자기계발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상대방도 이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이는 끝없이 순환되는 뫼비우스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우리들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자기계발의 프레임은 제가 원하던 것을 얻는 데에 도움을 주긴 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공부한 결실로 저는 제가 원하던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과 친구들은 그런 저를 높이 평가해주었고 저는 묘한 쾌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학교생활이 좋은 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무리한 자기계발을 위한 빡빡한 스케줄은 제 건강을 망쳐놓았습니다. 또한 훗날 인생을 돌이켜 보았을 때 값지게 여길만한 친구들과의 추억도 가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제가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능력이나 경력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계발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도 저는 쉽사리 자기계발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고민을 하는 시간 동안 제가 뒤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도중 우연치 않게 노자의 도덕경을 수업시간에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노자 철학을 이번에 처음 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윤리와 사상시간에 ‘노자철학은 무위자연’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배웠습니다. 당시에 저는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자철학이 지금 현시대에 와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이기를 전부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보다는 노자의 『도덕경』에 대해 보다 깊은 배움을 받으면서 노자철학에 대해서 조금 다른 접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제 욕망에 대한 생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삶의 거대한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노자철학의 핵심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는 “이름안가짐이 천지의 근본이고, 이름가짐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항상 의식에 비춰진 상태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개체에게 세계는 의식이 생겨날 때 탄생하게 됩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 태어난 인간은 사물에 대한 이름, 즉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의식은 이름안가짐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세계 역시 이름안가짐에서 시작하고 저는 이것이 노자의 이름안가짐이 천지의 근본이라는 말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념 없이는 대상에 대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분별하려고 할 때 ‘슬픔’ 혹은 ‘기쁨’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분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은 분별없는 카오스 안에 있습니다. 즉 천지의 근본은 모든 것이 분별없이 조화되는 카오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을 통해 세계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름을 갖습니다. 자신에게 젖을 주는 사람을 계속 접하면서 그 사람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사람을 계속 반복해서 느끼면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이렇게 개념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하나의 식(識)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세계를 분별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의 덩어리였던 세계는 분별을 통해 여러 가지 만물로 분화합니다. 이것이 노자가 이름가짐이 만물의 어머니라 말했던 이유입니다. 세계는 이름을 갖고 점점 명료해져 갑니다. 이 순간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던 세계에 만물이 탄생하게 됩니다.
비록 인간이 세계를 이름으로써 분석하기는 했지만 세계는 개념으로는 분석할 수 없는 동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나에게 젖을 주는 사람을 어머니라 이름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그 어머니는 내가 처음 개념으로 붙잡아 놓았던 그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머니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세포는 죽고 교체되고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대상 그 자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입니다.
이름이 대상 자체가 아닌 대상에 대한 생각이라면,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생각이 거듭 발동하는 것입니다. 발동된 생각은 계속해서 식(識)에 쌓이게 됩니다. 우리는 아까 말했다시피 세계를 의식에 비춰진 상태로 바라봅니다. 따라서 어떠한 생각이 식에 계속 쌓이게 되면 우리의 세계는 그 생각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채 비추어질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계속 그 대상이 집중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눈에 자주 보이는 그 대상에 대해 인간은 더 정교한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고 동시에 명료해지는 이름은 대상에 대한 생각을 발동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식(識)에 쌓이게 되면서 인간이 계속 그 대상만을 보게 됩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름 붙이기와 식(識)의 쌓임은 서로를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그 대상에 대해 특정한 지향을 갖게 됩니다. 즉 인간은 그 대상에 대한 하고싶음을 갖게 됩니다. 즉 이름이 인간의 하고싶음을 자극합니다.
이름이 인간의 하고싶음을 자극한다는 노자의 관점을 견지한 채 ‘자기계발’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자기계발 메커니즘의 원동력은 “남에게 뒤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남에게 뒤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원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만약 원하는 것이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남는다면 아무도 자신의 삶을 망가트려 가면서 자기계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의 삶을 괴롭혀 왔던 자기계발은 저의 하고싶음을 분석함으로써 그 진짜 모습이 드러낼 것입니다.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할 때, 이는 그 대상 자체를 원하거나 그 대상이 다른 원하는 대상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제가 자기계발로 스스로를 혹사해가면서 원했던 것은 명문대 진학이었습니다. 저는 명문대 진학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명문대 진학을 원했던 것은 사회적 성공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회적 성공 자체를 바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저조차 사회적 성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내용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성공이 무언가의 필요조건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회적인 성공을 통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저의 자기계발의 원동력인 사회적인 성공은 제가 그 자체로도 혹은 무언가의 필요조건으로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사회적인 성공을 원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노자의 이름에 대한 분석이 저에게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이 되었습니다. 제가 사회적인 성공을 원하게 된 이유는 사회적 성공이란 이름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각종매체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뉴스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다룹니다. 왜냐하면 성공한 사람들에 비해 성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드라마에서도 주로 고난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왜냐하면 각박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굳이 드라마에서 까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각종 매체가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이름을 자주 접하게 합니다. 이는 성공에 대한 생각을 발동시키고 또한 이 생각은 식(識)에 쌓이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성공에 대한 지향을 갖고 하고싶음을 갖게 됩니다.
비단 매체에서만 성공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은 자꾸 우리에게 성공을 강요합니다. 부모님, 학교와 같은 사회적 환경이 우리에게 성공의 이름을 주입시킵니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 부모님은 간섭합니다. 학교는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성공이란 이름이 전제된 긍정적 보상과 부정적 제재를 가합니다.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요소들이 우리에게 성공이란 이름을 말합니다. 베스트셀러의 대다수가 자기계발 서적인 우리 사회의 이름은 성공사회입니다.
저는 성공이란 이름이 촉발한 바램이 제 맨바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닌 것을 위해 바라고 있던 것에 대해 포기했을 때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성공이라는 이름이 촉발한 욕망이 스스로 바란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이루고자 진짜 맨바램을 외면합니다. 저는 도덕경을 통해서 제가 바랬던 것이 진짜 내가 바랬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욕망의 기원이 사실 내가 아닐 수 있다는 노자의 욕망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름에 가려져 있던 제 맨바램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고 진짜 저의 모습에 대한 내면적 성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이상 맹목적인 성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과제가 끝나면 저는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빌릴까 합니다.
노자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문명의 이기가 나오기 전인 상태로 돌아가라는 의미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노자의 말이 이름이 인위적으로 만든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 즉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진짜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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