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을 읽고>
2017.
11. 07
미술학과
2015318683 김정윤
양장의 노란색 표지, 한 뼘 쯤은 될 것만 같은 두께와 그 옆에 적혀있는
‘대우 고전 총서’, 또 뒷 표지에 나와있는 책에 대한 엄청난
소개, 그 모든 것들은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게 하는 데 만해도 수일이 걸리게 했다. ‘공리주의의 아버지’격이라는 전설적인 저자의 ‘서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양 또한 어떤 성실한 학생도 부담 없이
첫 장을 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처음을 시작하면 이 독후감을 읽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아 사실은 직접 읽어보았을 때 오히려 읽기 쉬웠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닐까?’ 라고. 그러나 아쉽게도 대게 철학저서나 법학저서가
그렇듯 이 책은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매우 읽기 어려운 책에 속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본문과
주석 내용 자체도 그렇지만 글의 어조 자체가 매우 고전적이며 한 자 한 자 그 뜻을 헤아려보아야만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겠다. 성문법이 적용되려면 그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법적 해석과 적용에 대한 직접적 ‘언어’가 존재해야 할 것인데 그러려면 ‘언어’자체가 가치 중립적이고 낱말 하나하나가 나타내고자 하는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어와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라서 벤담도
이 언어를 정의하는데 책 중반까지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번역되어있어서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나는 언어를 정의하고, 상황을 다시 그 언어로
재정의하면서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입법’의 기초
토대를 반듯하게 닦아 놓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에서 완벽히 적용키는 어렵지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예시들도 그렇고 저자는 분명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공리주의’라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가 가장 유명할 텐데 이 책에서 벤담은 ‘공리’보다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더 주장했다고 하고 벤담이 공리주의 창시자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깨달음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이 이런 인간 본성(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것)을
토대로 너무나도 철저히 형법과 입법, 사회의 도덕적 관념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교양 수업시간에도 그렇고 워낙 다양한 분야에서 ‘00주의’라는 말이 많아서인지 마치 인상파의 화가들이 ‘인상주의’를 발견하고 창조한 것처럼 받아들였었는데 철학적 분야에서는 누구나 모두 생각할 수 있고 생각 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책의 형태로, 언어를 빌려 정리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법의
기초부터 사람들이 특수한 동기와 의도, 상황에 따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행복의 양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지가
형법과 민법을 구분하는 마지막까지 끊이지않고 이어진다. 독자에게도 어느 정도의 사고력을 요구하는 이
내용들을 저자는 어떻게 구축해 나갔던 걸까? 전채적으로 집요한 사고와 깊이 있는 추론이 모두 드러나는
책이었다.
그런 책에도 내가 발견한 작은 문제점들 중 하나는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에서의 성 고정관념적 부분이었다. ‘여성의
감수성은 남성의 감수성보다 크’고 여성은 남성보다 ‘지식의
양과 질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지력의 세기와 정신적 견고함이라는 측면에서’ 명확히 ‘열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뒤에서는 여성의 애정이 더 확산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거의 모든 국가의 관습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금전적으로 의존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권위와 평가되는 진보,합리성에 비해 매우 전근대적이고 편협하며 성별에서의 차이를 생물학적 차이로 규정지어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불평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8세기 후반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모국인 영국에서는 유래없는 경제적 성장으로 대영제국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면서
프로이트, 칸트 등 유명한 철학,심리학 계에 대부분이었던
남성 전문가들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두 성별이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며 차별적인 분배로 인해 생긴 문제들과 결과를 졸지에 ‘어쩔 수 없는’것 혹은 여성이란 성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며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성이 아닌 다른 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인류의 반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굳이 여기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렇게 존경받고 다른 부분에서는 놀랄만큼의 통찰력을 발휘하는
저서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부분에서 의아했다. 물론 관련 내용이 들어간다면 이 책의 목적과는 맞지 않았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예시 곳곳에서 영국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시각과 인도인과 영국인을 비교 대조하며 인도인들을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으로 기독교 모태신앙인 나는 최근 종교에 대한 고찰을 많이 하게 되는데 기독교 국가로 유명한 영국에서 그것도 18세기에 이렇게 종교의 해로움과 그것이 미칠 수 있는 해악에 대해 객관적으로 썼다는 것이 인상깊었다. 종교, 특히 유일신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것은 그것을 믿지 않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곧 ‘악’이거나 이교도(이단)의 존재로 분류해 계몽해야만 하고 없애야만 하는 대상으로 보기
마련이었다. 오직 하나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행동이 아니며
그것을 주창하기 위해 치러지는 이른바 ‘성스러운 전쟁’에는
쾌락보다는 전반적인 고통이 더욱 크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적 박해가 없다는 것은 결국 사상가가 없다는
뜻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의견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였다..
실제로 현재까지 종교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과 참사, 전쟁과 테러는
무수히 많으며 책에서 말하는 범죄의 일/이차적 해악 모두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IS의 테러도 그렇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동 지역의 전쟁과
이슬람교 내에서의 많은 인권침해 현상들… 또 성서에 나와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뚜렷한 구절을 제시할
수 없는 카톨릭과 기독교에서의 낙태 혐오와 피임 반대, 성소수자 혐오는 얼마나 많은 사회의 쾌락을 앗아가고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나? 절대적인
존재가 진정으로 전지 ,전능, 전애 하다면 이런 일을 용납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책에서는 벤담의 종교가 무엇이고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하나만을 인정하는 종교적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만은 깊은 존경을 표하고 싶다. 형법의 정말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현대법의 기원을 마주하는 느낌이 드는 책이라 앞으로 법조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싶은 책이었고 행복과 고통의 계산 사이에 있는 공리주의에 대해 호기심이 동하는 인내심있는 이들에겐 더욱 추천할 만한 책이었다. 나는 그저 그 누군가가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면, 따뜻하고 끝없는 존경을 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