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tain, Exit의 합성어인 '브렉시트'가 영국 내에서 본격적으로 구체화된 2015년, 전 세계가 유럽연합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인 독일의 역할에 관심이 쏠렸는데, '독일의 역습'이라는 책 제목이 당시 국제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브렉시트와 더불어 EU에 닥친 위기, 예컨대 채권국과 채무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 난민 사태로 인한 분담의 문제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관건은 독일의 역할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이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사실상 이 책은 독일의 역할을 말하기보다는, 독일의 역설적인 입장, 태도를 분석한다. 원제도 The Paradox of German Power인데, 왜 paradox를 역설이 아닌 역습으로 번역했는지,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될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유를 깨닫지는 못했다. 독일이 패전국에서 어떻게 유럽의 강호가 되었는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독일의 역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책에서 설명하는 독일의 역설적인 대외정책, 정상화의 개념, 경제부양정책 등의 모순을 본다면, 독일의 역설이 더 적절한 제목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당시 브렉시트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전이라, 책에는 브렉시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EU가 흔들릴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브렉시트와 같은 분열, 탈퇴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로존 위기에 대한 독일의 대처
메르켈은 마스트리히트 조약 125조를 들어 구제 금융 불가 방침을 확실히 밝혔다. 그러나 2010년 5월에 그리스가 디폴트 직전까지 몰리자 독일로서도 어쩔 수 없이 7천 5백 유로의 자금 공급 계획을 승인했다. 또한 위기에 빠진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재정안정기금을 설립하는 것에도 찬성했다. 그러면서도 메르켈은 국제통화기금과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 그리고 유럽중앙은행 등, 이른바 트로이카가 참여하는 혹독한 조건들을 고집했다. 독일은 그리스에 가혹한 예산 삭감과 임금 삭감을 요구하면서 이 나라의 내수를 살리는 부양책만은 거절하였다. 결국 위기에 대한 독일의 접근법은 주변부로 여겨지는 나라에서는 디플레이션을, 중심부로 여겨지는 나라에서는 비인플레이션이라는, 이른바 불균형적인 조정 방식이었다. p.80
사람들마다, 또는 국가마다 특정 국가가 갖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나에게 독일이라는 나라는 전범의 역사를 반성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 유럽의 패권을 쥔 국가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역시 국제 관계에 있어 한 국가를 '좋은 나라', '나쁜 나라' 처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평가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스 금융위기를 시작으로 유럽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독일 메르켈 총리의 단호한 결정은 냉정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나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총리의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빠르고 냉정한 판단의 이면에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들이 절대 충족시키기 어려운 혹독한 조건과 압박이 있었다. 유럽연합이 내세우는 통합과 공존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 추구를 우선순위로 두고, 주변부 국가들에게 독일식 모델을 강요했다. 물론 독일이 주변부 국가들의 금융위기를 반드시 감당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연합의 수장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금융위기에 대해 불균형적인 조정 방식을 택해 채권국과 채무국 간의 불균형 정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위기에 봉착한 유럽연합을 이끄는 위치에서 내린 독일의 빠른 결단은 회원국들을 위한 결정인 양 비춰졌지만, 실상은 회원국들로 하여금 독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형국을 만들었다. 여기서, 복잡한 이해로 얽힌 국제 관계 속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역설
독일의 힘은 경제적 단호함과 군사적자제의 독특한 혼합으로 그 특성을 정의할 수 있다. 유럽 내에서 독일은 자신들의 우선순위를 다른 국가들에게 부과하기 위해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는 정상적이다.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처럼 유럽을 넘어서서 자국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야망은 거의 품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독일은 그저 더 많은 자동차들과 기계들을 팔고 싶어 하고, 특히나 무력 사용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비정상적이다. p.104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독일의 역설이다. 경제적 단호함, 즉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 요구를 억제하는 동시에, 군사적 자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대외정책을 추구하는 독특하고도 역설적인 특성을 말한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군사적 힘보다는 경제적 능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무력 사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물론 군사 강국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처럼, 군비를 증축하거나 필요한 경우 무력을 언제든지 사용하려 하지는 않았다. 패전국인 독일이 무기 사용, 군비 증축에 제약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21세기에 들어서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이 발칸반도, 이라크와 같은 일부 지역에 군사를 요청하거나 무력 사용을 요구했을 때 독일이 망설이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히 전쟁의 역사, 나치의 만행이라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상성' 개념의 변화
이런 배경에서 새로운 통일 독일에서는 이른바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놓고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1980년대 중반의 역사 논쟁에서 보듯 정상성이라는 개념은 마침표를 찍는다라는 생각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 결국 독일의 우파가 말하는 정상화란, 자신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기도 하며,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독일 국민을 해방시키며, 나치 과거에 덜 구애받으며, 나아가 다른 국가들처럼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또는 동맹국으로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군사 행동의 자유 등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 p.195
그러나 2002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상당수의 사민당 의원들은 이라크 전쟁 개입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이 정상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한 예로 원내대표인 프란츠 뮌터페링은 2002년 10월에, 이제 독일은 당당하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상적인 국가라고 선언적으로 말했다. 이는 정상성이라는 말의 또다른 버전인 셈이다. p.242
위에서 언급한 역설적인 특성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 비정상적인 국가로 인식했으며, 특히나 무력 사용의 제약이 있다는 점이 비정상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무력 사용 제약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독일이 지불해야했던 배상금의 액수, 벗어날 수 없는 과거 등이 모두 비정상적이라는 사고로 이어졌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다시 말해 '정상화'의 개념은 그렇게 등장했다. 이제는 더 이상 유럽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맹국으로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임을 공고히 하고, 군사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되었는데, 독일은 더 이상 우방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임을 선언했다. 정상화의 개념은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이 대내,외로 시도하려는 움직임과 유사하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전쟁 이후 군사 활동에 제약을 받았는데, 자국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서는 군사 활동이 가능하다는 명목으로 자위대를 구성했다. 더 나아가 평화헌법을 개정해 자위권 행사를 현실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행보는 모두 '미래를 향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목표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일의 정상화 개념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 일본과 독일의 정상화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정상화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정상화 개념 저변의 사고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두 국가 모두 전범국으로, 그들 국가의 정체성은 과거 역사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정상화의 움직임은 마치 과거에 얽매여있었던 이전은 비정상적이고, 더 이상 전범의 역사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앞으로가 정상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전쟁의 역사를 잊고, 반성하지 않고, 더 이상 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때의 역사가 반복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변국들은 정상화의 움직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