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리바이어던이란 구약성서 용기편에 등장하는 바다괴물을 지칭한다. 큰 바다 / 혼돈을 뜻하는 이 용어를 토마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의 제목이자 핵심 개념으로 활용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강력한 국가’ 또는 ‘통치자’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면서, 자연인의 능력이나 권한을 넘어서는 강력한 존재로 규정했다. 홉스는 바람직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통치자’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토마스 홉스에 따르면 태초의 상태,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 자기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개인 대 개인으로 자연 상태에서 맞부딪히는 인간 사이에 분쟁이 반드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Free for All)’ 상태에 놓이며, 공포와 폭력이 만연한 전장 상태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개인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통치자 혹은 주권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고 신민이 된다는 것이 토마스 홉스의 주장이다. 주권자에게 ‘리바이어던’이 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하고 폭력에서부터 보호받는 것이다. 홉스는 주권자와 신민 사이에 ‘강력한 권력 -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라는 교환이 존재하며, 이 교환이 바로 ‘사회계약’이 된다.
리바이어던, 강력한 통치자의 권력이 ‘사회계약’을 기초로 정당성을 얻는 셈이다. 따라서 만약 통치자가 권력을 신민을 탄압하고 위협하는 데 사용한다면, 신민은 통치자의 부당한 권력 사용에 대항하는 ‘저항권’을 사용할 수 있다. ‘저항권’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에서 최초로 주장한 개념이며, 왕권신수설이 지배하던 당대 역사관에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점은,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을수록 동아시아의 중세 통치관이 겹쳐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이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관념은 성악설과 법치를 주장한 순자의 개념과 맞닿아 있고, 강력한 통치권을 보유했으나 신민을 마음대로 탄압할 수 없었다는 건 중국과 한국의 중세 통치관과 상통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성혁명’이 종종 발생하곤 했는데, ‘역성혁명’을 할 수 있는 핵심 명분이 바로 ‘민심이 떠난 왕은 필요 없다’였다. 강력한 통치자라고 해도, 신민을 탄압하거나 고통받게 할 경우 동양에서 시행한 저항권이 바로 ‘역성혁명’이라는 통치자 교체인 셈이다.
그렇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왕권신수설이 만연하던 시대관념을 전환하는 데 의미가 있었을 뿐, ‘강력한 통치권’을 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리바이어던의 저술 시기인 영국의 1600년대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극한 대립하던 시기인데, 문제는 홉스의 의견은 의회파와 왕당파 각 주장의 핵심을 양보해야 하는 절충안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홉스의 이론은 ‘강력한 통치권을 옹호한다’는 의회파의 비판을, ‘왕권신수설을 부정한다’는 왕당파의 비판을 받아야 했다.
동아시아의 정치 시스템은 홉스가 주장한 ‘리바이어던 + 저항권’에서 리바이어던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좀 더 정립된 형태의 대안이었던 듯싶다. 고려의 경우 호족연합국가였다는 점에서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지방호족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고, 조선의 경우는 군신관계는 확실해졌지만 왕권의 전횡을 막을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견제 장치가 확립되어 있었다. 삼사(三司)인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의 존재, 유교경전을 바탕으로 왕과 신하가 의견을 나누던 ‘경연’제도 등이 있었다. 왕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를 두어 ‘리바이어던’을 옥죄고 견제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통치자를 제안하되, 통치자의 권력이 신민과의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주장했다. 따라서 통치자가 올바르지 못하게 권력을 사용할 경우 대항할 수 있다는 취지의 ‘저항권’이라는 개념까지 제시했다. 다만 ‘저항권’이라는 개념이 실질적인 견제 수단으로 기능한다기보다는 왕권신수설에서 사회계약론으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매개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강력한 권력을 제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으로 보기에는 미약했고, 이 점 때문에 당시대의 의회파조차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