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액자형 스토리를
갖는다. 그리스어 교사 그레고리우스가 액자의 테두리라고 볼 수 있고 포르투갈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가
액자 속 사진의 주인공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의 인정 또한 받으며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한 중년 남성이다. 여느 때처럼 학교로 향하던 그레고리우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리
난간 위에 올라가 있는 젋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자살을 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뛰쳐나가 그녀를 막았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녀를 교실까지 데려왔고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어디론가 떠난다.
‘포르투게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녀는 한
권의 책 또한 남기는데 이는 아마데우 프라도의 자서전이다. ‘포르투게스’라는
소리와 그 책에 큰 끌림을 느낀 그는 수업 중간에 학교를 나온 뒤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렇게
해서 그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가 리스본으로
향한 계기는 정말 신기하리만치 단순하고 사소하다. 포르투갈어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만으로 갑작스럽게 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좀 이해가 안되었다. 주인공은 새로운 삶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었나 보다. 그렇게나 조그마한
자극을 받고도 바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를 용기와 결단력이 있으니 말이다. 이 부분은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없이 이루어진다.” 아마데우는 우리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그 무언가가 사실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아마데우는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게 정해지지 않고 조용히 변화하는 삶에서 예술성을 발견한 것 같다. 나도 이 부분에 동의한다. 그 사소한 것들이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두렵지만 그래서 인생이 예술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그와 나의 생각이 갈리는 부분은
이 사소한 것들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있다. 아마데우는 사소한 사건들을 우연한 사고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포르투게스' 책 속에 나오는 실존 인물들을 만나러 다닌다. 아마데우의 여동생 아드리아나도
만나고 비밀 경찰에 의해 손이 불구가 된 피아니스트 주앙 에사도 만난다. 아드리아나와 주앙 에사와의
대화를 통해 아마데우가 어떻게 의사에서 저항군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
당시 포르투갈은 살리자르의
독재 하에 있었으며 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격변기였다. 즉 사회적 요구의 과잉의 시대였고 개인으로서의
존엄보다는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대응하기를 강요받았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공공의 적 멩지스의
목숨을 살려준 프라두의 행위에 대한 평가이다. 프라두는 멩지스를 비밀경찰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 보고
그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의사의 마땅한 의무라 생각했지만 조지를 비롯한 리스본 민중에게 멩지스는 사회악 중의 악일 뿐이었고 혁명을 위해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비밀경찰이었다. 반대로 프라두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본다면 그는 의사이기에 멩지스를 살렸어야
했고 프라두를 인간으로 본다면 그가 멩지스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결정 중 어느 결정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사회가 과잉된 시대 속에서 멩지스도, 프라두도 인간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비극은 인간을 단순히 사회의 부속품으로 취급한다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황을 본다면 아메데우는 어떤 결정을 했을까? 아마 그는
멩지스를 살렸을 것이다. 주앙 에사의 말을 빌리자면 “인내심이나
우직함이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만한 인내심은
그에게 없었다. 또한, 그는 사회적인 욕구보다 상위 개념인
미적 혹은 종교적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일례로, 조지가
스테파냐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죽여야 한다 말했을 때 아마데우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버렸다. 그는
저항군이기 이전에 스테파냐를 사랑하는 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과잉된 시대는 아마데우가 살아내기에는 참 어려운 시대였다.
다음으로, 사회의 과잉 속 개인이라는 맥락에서 아메데우의 불꽃같은 연인 스테파냐도 다룰 수 있다. 그녀는
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항군에게 유용한 인적자원으로 쓰였다. 망각하지
않는 그녀의 특별한 능력은 그녀를 사회의 부속품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저항군에서 또한 그녀를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다가 비밀의 발설이 우려되자 급기야 부속품 버리듯 그녀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정부 측에서도 그녀를 사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녀를 대용량의 정보더미로 대했을 때 아마데우만은 그녀를 아름다운 스테파냐로 대해주었고 그녀가
아마데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마데우마저 그녀를 자신의 불안함과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도구로 대한다고 느꼈을 때 그녀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힘든 인생을 산
스테파냐가 세월이 흘러 그레고리우스를 만나고 추억에 잠겨 아무렇지 않은 듯 아마데우와의 사랑 이야기를 회상하는 모습은 그녀가 잘 살아왔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한 번 안아주고 싶을 만큼의 정이가는 책은 아니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책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하자면 스토리와
메시지 자체가 “납처럼 무겁다.” 작가는 아마데우를 닮은
것 같다. 세상만사를 한계가 많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하려 시도하지만, 그래서 내용이 무겁고
복잡하며 생각이 너무 많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책의 첫 페이지에 인용된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대변한다. “우리 모두는 여럿. 자기 자신의 과잉.” 이 책이 그렇다.
그러나 밑줄 치고 싶은 문장들이 많이 포진한 책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교훈을 주는 문장들도 있었고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용하고 우아하군요. 지나치게 번쩍이지 않는 은처럼.” 이런 유의 문장들. 정말 아름답다. 작품의 창의성과 미학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납처럼 무겁고 깃털처럼 자유로운” 이 책을 읽을 때는 가벼운 마음과 머리로 읽기를 권유한다. 머리를
비우고 읽어야 한다. 액자식 스토리 구성이라 과거와 현재, 아마데우의
삶과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오가서 헷갈리고 머리가 복잡해질 수 있다. 또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지만 생각의 굴레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만약
한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 넘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페이지를 더 넘기다 보면 다시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팁은 이름을 잘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는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 때문에 읽는 내내 누가 누구인지 헷갈렸었다.
아마데우는 “우리는 떠날 때
우리 자신 일부의 조각들을 남기고 간다. 그곳에 다시 가야만 찾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무엇이 있다.” 아마데우의 삶은 그냥 잊혀지지기에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삶이 신비로운 언어인 포르투갈 어로 기록되어 한 여자에 의해 스위스 베른의 그리스어 교사에게로 전해졌고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이뤄 놨다. 아마데우는 세상 곁을 떠났지만 그의 흔적들을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놓았고 그곳에 가서 그 기억들을 찾은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