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이론
<나의 타자>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직면하고 나에게 되기를 요구하는 수많은 가면들 속에서 본질적인 나의 조각을 찾고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한 저항적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통해 보다 사회적이고 관계적 측면에서 존재에 대하여 접근하고자
한다. 파리 초고로 알려진 <경제학·철학
초고>는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의 인성론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유적 존재인 바, 이는
그가 실천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유를, 다른 사물의 유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유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 그리고 이것은 동일한
사태의 다른 표현이지만 – 그가 현재의, 살아있는 유로서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도 관계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마르크스는 위의 <경제학·철학 초고>의 한 단락에서 개별적 인간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유와 독립적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 개념화한다. 해당 용어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철학에서 유래하였으나, 인간의 성질을 불변하는 내재적 추상물로 본 그와 달리 마르크스는 유적 존재를 통해 인성이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인 관계, 환경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으며, 가변적임을 주장하였다. 즉, 사회 속에서 인간이 겪는 갈등, 협력, 감정, 권력, 소외 등은 인간이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고 그렇기에 관계 내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성론은 대상적인 세계 속에서 스스로가 유적 존재임을 물질을 통해 증명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동일한 저서에서 인간이 생산활동을 함으로써 자연을 가공하고 그 결과물을 현실에 존재하도록 하고, 따라서, 노동은 단순한 생산 이상의 인간의 유적 생활이 됨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관계들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소외된 노동을 낳고 이는 다시 인간의 유적 생활으로부터의 소외, 나아가 본질적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이끈다. 그렇다면 인간을 유적 본질로부터 괴리시키는 소외된 노동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환경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사회구성원의 양도 불가능한 기본권으로 규정하는 사회체계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는 재화의 소유권을 바탕으로 타인과의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물물교환의 형식은 구성원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수확한 사과를 이용하여 바나나를 얻고자 했을 때 바나나를 가진 이가 사과가 아닌 배를 원한다면 교환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교환 당사자들의 욕구의 일치가 거래를 위해 필요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화폐이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이행에 따라 화폐가 물신성을 가지게 되면서 발생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물신성이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 실체를 갖게 되며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되는 것이며, 그는 자본주의의 주요한 성격으로 화폐의 물신성을 꼽는다. 인간이 재화 및 서비스의 효율적 교환을 위해 만들어낸 화폐가 그 자체로써 사람들의 목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가 임금으로 치환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성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의 자아실현 기능을 퇴색시키며 그 목적을 임금 자체로 일원화한다. 우리는 살면서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곤 하지만 이러한 어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오히려 돈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만 의미가 있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화폐에 부여한 의미를 철회할 수 있을 때에서야 물신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의 물신성의 존재는 사람들의 인식 체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돈과 부가 그 자체로 갖는 목적성은 소외된 노동을 낳는다. 그 과정은 단계적이다.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바와 같이 상품교환의 유통영역이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공리주의적 영역이라면 이윤은 결코 교환의 영역에서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상적 교환은 같은 가치를 갖는 것 간의 등가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의 물신성은 한 쪽이 비용을 덜 내고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부등가교환의 구조를 형성하고 이는 다른 한 쪽의 손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돈의 물신과 결합하여 등가교환을 지향하지만 부등가교환의 체계를 구축한 구조적인 모순을 갖는다. 노동의 제공자는 노동량에 상응하는 대가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이 부조리가 돈의 물신성이 소외된 노동을 낳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소외된 노동은 자본주의의 구조 하에서 합리화된다.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거대한 한 축을 이루는 기업의 형성과 그 본질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올리버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은 시장 구조의 거래비용적 비효율성에 입각한 조직경제학을 주장한다. 기업은 시장의 자율적 거래 속에서 발생하는 거래비용이 조직화 비용보다 높을 때, 효율성을 위해 조직이 형성되고 거래를 내부화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직의 구조와 구성방식에 따라 기업의 성과는 달라지나 단순한 개인들의 협력 성과를 종합한 것의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구조가 어제와 다르게 되어 발생가능 총이윤이 바뀐다고 가정하면, 그 이윤의 원천이 오롯이 구조의 효과가 되는가? 부분적으로는 인정 가능하지만 이윤의 근본적 원천은 상품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의 몫을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노동과 임금의 등가교환 구조에서 추가적으로 얻게 되는 성과의 일부는 노동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부의 물신은 이미 부등가교환의 구조를 만들어냈고, 이 모순적 체계는 자본주의에 의해 강화된다.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생산력이 그 원천이 되는 노동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내재하고 있음을 합리화하고 자본이 없었더라면 이뤄낼 수 없는 성과라며 노동 가치의 착취를 가능하게 한다. 개인 간의 교환에서 상응하는 권리의 교환을 의미하는 교환적 정의는 합법적으로 위배 가능하게 되며, 상품교환의 원칙에 의해 보증되는 대등한 두 권리가 맞닥뜨릴 때는 ‘힘’이 그 문제를 해결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의 소외 현상이 나타나고, 이는 다시 노동으로서 본질적 자아를 실현하는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로부터 노동을 앗아가며, 자본량이 곧 힘이 되는 계급을 만들어낸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서술한 것은 이를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매몰되는 대신 그가 생각한 인간관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그의 논의를 해석하면, 그의 말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계급’, ‘갈등’, ‘자본주의 체제의 멸망’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특히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부정적인 언어들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 될 것이다. 위 모든 키워드들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최종적인 목표적 성격을 띠는 말들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가 달성할 수 있는 수단, 해소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체제, 현상 등을 의미하는 결과적 성격의 말들이다. 그가 주장하는 혁명의 본질적인 목표는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에 대한 회복이다. 인간 간의 관계를 비롯한 노동으로 연결되는 자기와 자기 스스로의 관계의 복원이다.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인성론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사상들을 인문학적으로, 보다 인간에 가까운 형태로 해석함으로써 관련된 통찰을 심어준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지금껏 우리가 경험해온 전부이기 때문에 일방향적인 사상과 관념에 사로잡힐 위험을 상존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과 저자의 생각은 우리네 세상에 대한 보다 비판적 관점을 제공하고 관련한 생각의 외연적 확장의 기회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