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서문 말미의 문장을 혹시 기억하는가? 이 책을 기준으로 한다면, "동시에 잠시라도 그 높은 곳에서 제가 머물고 있는 이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제가 그간 크고 지속적인 운으로 인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는지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p.60)라는 문장이다. 군주론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마키아벨리는 거의 대부분의 위업을 자질(virtu)과 운(fortuna)이라는 틀을 이용해 설명한다. 이를 감안하면, "내가 자질은 있는데 운이 나빠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뜻이라 해석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 이런 문장을 쓴다면 지나친 자기과시 또는 허장성세로 읽힐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 책에서 나타나는 마키아벨리의 뛰어난 자질과 그의 일생 전반에서 드러나는 매우 나쁜 운을 감안한다면 이 문장보다 더 명징하게 마키아벨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점은, 이 책이 학술적글쓰기 교재로 쓰일 수 있을 만큼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사례 연구 서적이라는 점이다. 각 장의 구조는 주장 - 근거 - 사례 연구로 되어있으며, 각 장 또한 마키아벨리가 나름대로 분류한 군주국의 종류 및 통치술을 위하여 필요한 요소라는 두 가지 소주제에 연관이 되어있다. 그리고 두 소주제 또한 어떻게 잘 권력을 지킬 것인가 하는 대주제로 연결이 된다. 유기적인 글은 가독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글의 질과 주장의 설득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군주론이 1532년에 발간되었음을 감안한다면, 권력이라는 사회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현대 문헌과 견주어 보아도 크게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례 연구를 행했다는 점은 충분히 높게 평가받을만 할 것이다.
책은 권력자, 또는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책이 메디치가에 헌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종의 처세서로서 독해할 여지도 있으며, 근대 국가론의 오래된 미래로 볼 여지도 있고, 현실주의 정치학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세서로서 독해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관계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구절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잔학한 조치는 반드시 일거에 시행돼야 한다. 그래야 피부로 느끼는 고통도 줄어들고, 반감과 분노도 덜해진다. 반대로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맛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다."(p.129),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되 사랑은 받지 못할지언정 증오를 사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능히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서 증오를 사지 않는 존재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87). 이러한 문장은 현대의 자기계발서에 실려있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문장인데, 거기에 더해 관련 사례까지 제시를 한다. 이러한 문장을 곱씹어봐야 하는 자는 비단 500년 전의 통치자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좋든 싫든) 우리 또한 우리 삶의 통치자이므로.
근대 국가론의 오래된 미래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이 권력 획득의 과정에서 국군의 중요성과 군주(=국가)의 전쟁술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사회학자인 찰스 틸리의 국가론과도 궤를 같이 한다. 틸리는 전쟁을 통해 국가가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왕이 최고 사령관이 되기 때문에 귀족 등에 분산되어있던 권력이 왕에게 집중이 된다. 왕은 집중된 권력을 이용해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을 추출한다. 평상시라면 주어지지 않았을 인력, 식량, 무기 등이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으로 인해 쉽게 추출이 된다. 이 추출 과정에서 각 행위자가 어떤 전략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양상이 달라졌다는 것이 틸리의 국가론이다. "일개 시민이 권력을 틀어쥐는 것은 용병대에 의존하는 공화국보다 국군을 보유한 공화국에서 훨씬 어렵다"(p.153), "자신의 권력에 기초하지 않은 권력의 명성보다 더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p.167)라는 두 문장을 고려하면, 마키아벨리를 근대 국가론의 오래된 미래라고 보는 것도 그다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현실주의 정치학의 시작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는 많은 거리가 있지만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근대 정치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는 권력의 이상보다는 권력의 실재에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고, 이는 정치에 있어 코페르쿠니스적 전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이 당위를 넘어 일종의 과학이 된 것이다.
처음 고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군주론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한다. 논리구조가 뚜렷하고, 특정 시대의 특정 국가 저자들처럼 가독성 떨어지는 문체를 사용하지도 않으며, 여러 번역이 존재해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오독을 할 가능성 또한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