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작가로 잘 알려진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또 다른 소설, <맨디블 가족>. 2029년, 금융위기가 미국을 강타하며 세계 최강의 국가가 제 기능을 못 하게 될 때, 천천히 변모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날카로운 일침과 해학으로 가득하다. 덕분에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책을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든다.”
표지에 적힌 이
일상적이고도 절망적인 부제는 이 두꺼운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관통한다. 2029년, 미국에 들이닥친 역대 최악의 금융위기는 각자의 일상적인 고뇌에 가득 차있던 맨디블 가족 삶의 가장 구석부터 서서히
침투한다. 처음에는 그저 그날의 저녁 찬거리를 걱정할 만큼의 가벼운 고민거리였다면, 나중에는 목숨을 건 노숙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그야말로
고난에 고난이 덮쳐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는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환영하지 않게 되면서 미국 명문 조지타운대학의 고집 센 경제학 교수는 하루아침에 괴짜 실업자로 전락하고, 맨디블가의 "가족"다운 관계를 지탱하게 한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더글라스 맨디블의 막대한 자산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재앙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신념은 굳건한가? 지금까지 견지해오던 도덕적 통념이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가 된다면, 인간은 과연 얼마나 비도덕 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 책은 일상에서 극한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각각의 인간은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겪는지에 관하여 아주 설득력 있고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히
가족의 결합과 소중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맨디블
가족이 더는 누릴 수 없게 된 사치는 바로 영구히 등을 돌리는 일이었다.”라는 글귀처럼, 가족의 표면적 의미와 이것이 사회적 공동체를 넘어 부여하는 일종의 구속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무려 4대에 걸친 대가족에 있는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며 일반적인
당위보다 조금 더 원초적인, 하지만 쉽사리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건드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다. 마음 깊이
공감하면서 읽다가 중간중간 씁쓸한 미소를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작가 특유의 비관적인 유머 감각과 휘몰아치는 반전과 충격으로 가득 차 있어 독자에게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책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이유는 모호하고 무책임한 결말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사회의
붕괴와 그에 따른 또 다른 사회적 공동체, 즉 가족의 붕괴를 빈틈없이 서술하지만, 그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희망 또한 제안한다. 책의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일말의 희망도 없이 맨디블 가족을 몰아세우는 고난들에 조금 지쳐갈 때쯤, 실낱같은 희망이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조차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 희망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또 다른 고난이자 도박인 것이다. 선택은 온전히 그들 각자의 몫이다. 소수의 도박꾼이 만드는 새로운
공동체는 기존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라기보다는 태초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진 듯 보인다. 그 위험한 실험에 뛰어들어 다시금 원시적인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어쩌면 맨디블
가족의 일원 몇이 아닌 미래의 인류 전체의 회귀를 예견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