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빛난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익숙해지면 괜찮다?
“하루하루 배우는 것들은 쌓여만 가는데 일에 필요한 것들만 남을 뿐, 내 색과 사람이 가지는 원초적인 욕구는 사라져만 간다. … 요즘 잠을 이룰 수 없다. 설 연휴가 지난 후부터는 계속해서 꿈을 꾼다. 벌써 4일째, 나는 오늘도 잠자리에 들어 생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몸서리치게 바쁜 것도 아니지만, 정체 모를 불안함이 무섭다.”
나는 이 글에서 작성자의 사회적 우울을 느꼈다. 자본주의는 톱니바퀴를 강요한다. 톱니바퀴는 회색빛, 작성자는 자신의 온몸이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댓글이 꽤 달려있었다. ‘어떤 방안들을 적어 놓으셨나.’하고 스크롤을 내렸다. 그들의 위로는 한결같았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나도 처음엔 많이 어려웠어.” 그런데 위로로 익숙함 찬가를 외치는 친구들에게 작성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작성자에게 ‘익숙함’이 적절한 처방이었다면, 진심 섞인 고마움을 전달했을 텐데. 작성자는 "고맙다."라는 말을 간결하게 하고, 친구들을 칭찬하거나 안부를 물었다. 작성자에게 익숙함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던 듯하다. 익숙함은 사회적 우울에 대처하는 너무나 상투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익숙함을 제외한 다른 방법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우리가 무엇에 익숙해지고 있는지, 익숙해지는 건 어떤 의민지, 왜 익숙해지면 색채를 잃어버리는지…등의 얘기는 우리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사람들은 ‘조금 더’ 버티지 못해서 자살하고, 사회적 우울에 빠지는 걸까.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인간상이 정말로 인간다운 인간상일까.
미국의 유명 작가 월러스는 “우리는 도덕적으로 조상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세대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결코 한국 사회에 더욱 시사점이 있다. 부모님 세대가 교육받을 당시, 조상님들은 예의범절과 위계질서를 무척 강조했다. 부모님 세대는 교육을 대부분 흡수했고, 우리나라의 서열 문화는 강화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사뭇 다르다. 도덕과 예의는 자유와 자율로 대체되고 있다. 자신만의 도덕률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의 도덕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면 꼰대가 된다. 이런 현상은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길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후대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기술을 얻지 못한다. 이는 분명히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현대인들은 책임의 사슬에 묶여 산다. 책임을 운이나 신 같은 미신적인 요소에 돌리지 않으려 한다. 잘한 일은 자기 덕분으로, 못한 일은 남의 탓으로. 어쨌든 책임은 실존 영역 안에 머물러 있다. 방안을 찾지 못한, 지혜를 전수받지 못한 사람들은 책임을 지기 위해 의지에 의존한다. 이는 개인의 탓이 아니다. 현대는 실존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므로, 강인한 의지가 인간에게 중요한 제1가치가 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실존주의는 자책으로만 연결되고 있다. 사회적 우울을 관리하는 사례를 교육받은 내용도 없고, 교육이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교육은 위인들을 내세우고, 노력을 강조하며 자기계발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자아를 정립하지 못한 채 익숙함만이 사회적 우울과 무기력의 첫 번째 대처방안이 되었다.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찬란하게 빛나는 소중한 삶을 잃어버리고 있다.
한병철의 에세이 『피로사회』는 경제구조(자본주의-성과주의)가 우울을 유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글에서 말하는 우울은 개인의 ‘우울증’이 아니었다. 각 시대를 규정하는 질병이 있는데, 현대 사회는 그 질병이 우울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처방은 ‘각자의 답을 찾아 나서기’였다. 각자의 답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근본적인 피로를 포함한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모든 것은 빛난다』의 저자들은 한병철이 강조한 근본적 피로에 동의하는 듯하다.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장인정신 ‘메타 포이에시스’에 다가가기 위해선 근본적 피로를 겪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답을 찾아 나서기
월러스는 우리 스스로 선택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월러스가 말하는 구원의 가능성은 가장 힘든 일인 동시에 가장 가난한 것이다. 첫 번째는 행복이 찾아왔을 때마다 따는 것 없이 판돈만 자꾸 오르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희열, 가족 식사의 편안함과 감사, 그 어떤 행복으로도 거기에 다가가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가장 진부하고 두려운 실존의 순간에서조차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힘든 구원의 상이 정말 매력적인가 하는 데 있다. …… 강인한 의지로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지가 인간에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인간됨 자체가 세계와 자신에 대한 경험 방식을 제한하고 있다면? (모든 것은 빛난다, 90~94)
저자들은 강인한 의지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니체의 주권적 자아는 인간에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강인한 의지만을 중심으로 삼는 월러스의 주장과 현대 사람들의 태도는 무척 비슷해 보인다. 설정한 이상에 자신이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달은 월러스가 자살했듯, 수많은 이상향이 인간다움의 빛을 없애고 있다. 이상향은 어떤 면에선 스스로에게 주어진 과제다. 하지만 사랑에 완벽이 없는 것처럼 추상적 과제에도 100%는 없다.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 자아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이상 자아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상 자아에 도달하고 싶다면 어린 루터가 했듯이, 잘못을 할 때마다 고해성사를 하면 된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해도 부정한 생각이 사라지진 않는다. 생각은 할 수도 있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 시절의 루터가 추구했던 이상향들은 절대적인 인간됨 때문에 결코 성취될 수 없었다. 루터는 삶의 말미에 절대적인 인간됨을 인정하고 ‘감사’ 개념을 도입한다. 종교인이었던 루터는 역설적으로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강인한 의지만으로는 결코 종교적 ‘이상향’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저자들은 인간의 책임과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실존주의의 대척점인 ‘완전한’ 종교적 관점에도 반대한다. 월러스와 대비되는 작가인 길버트가 주장했듯이, 뛰어난 능력이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나온다면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가 연필을 찾으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연필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는 우연에 의존하는 생각은 수동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중세 시대는 모든 행동 양식(심지어 죄마저도)이 신의 존재 아래서 해석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 부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한 명 있었는데, 부대에서 휴대폰을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결론난 일을 하느님이 안겨준 시련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행위를 성찰하기는커녕 시련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며 하느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책임을 하느님에게 돌려 편한 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렇듯 저자들은 중세 시대의 일신론은 수동적 허무주의(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와 광인주의(진리는 하나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 같은 일신론도 거부, 실존주의도 거부… 그렇다면 저자들의 답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결국 답은 실존주의에 있다.’고 주장하는 한병철과 사뭇 다른 방안을 제시한다. 그들은 다신주의와 장인정신을 결합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다시 ‘빛나도록’ 만들려고 한다.
다신주의 철학으로 각자의 답 찾기
호메로스의 그리스인들은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현대인들은 자기응시에만 익숙한 나머지 정조들을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만 간주한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내적인 경험과 신념을 통해서 이해하기보다는 널리 공유된 정조들에 휩싸여 사는 존재로 간주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처해 있는 상황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이런 정조들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바로 신들이다. 신들은 각기 상이한 정조들을 비춰주며, 역할이 어긋났을 때조차 왜 상황이 어긋났는지를 밝혀준다. … 호메로스가 그려낸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성스러움을 느끼는 감각을 부여해준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실존의 기쁨과 슬픔을 보증해주는 성스러움 말이다. (112~114)
다신주의는 쉽게 말하면 예수, 알라신, 마리아, 붓다 등을 다 믿는다. 혹자는 “믿을 거면 하나만 믿지 신을 몇 명이나 믿는 거야?”라며 냉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신주의 철학은 ‘우리는 최대한 신을 많이 믿어야 한다.’는 의미를 띠지 않는다. 다신주의는 호메로스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호메로스는 삶에 깃들인 성스러움을 밝혀 주는 외적인 정조에 집중하고자 했다. 다신주의 철학에는 인간이 자율적으로 무엇을 행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문제 상황이 선행하고,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행동은 책임에서 비롯되지 않고, 여러 가지 정조들에 따라 ‘행동되었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조율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면 무한한 이해심이 생긴다. 불륜도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주관하는 에로스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잘 살펴보면, 글 속의 포르투나처럼 무작위적인 행운이 나를 감싸는 게 아니라 신들이 ‘나’를 보호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인들은 감사를 느낀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문제 상황(긍정이든 부정이든)이 있고, ‘나’는 거기에 존재한다. 긍정적인 상황에서 현대 사람들은 ‘내’가 잘한 게 전제고, 약간의 운은 부차적 요소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남 탓은 도덕적 비난을 받고, 신 탓은 미친 사람 취급받는다. 책임은 내 몫이다. 간디는 “당신이 어떤 일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임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책임의 족쇄에 머물러 있다는 명확한 말이 아닐까.
다신주의 철학은 상반된 의견을 펼친다. 긍정적인 상황은 신들과 조율이 잘 되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신들은 나를 보호해주고, 긍정적 상황에는 감사함과 성스러움을 느낀다. 불륜 같은 부정적인 일조차 에로스의 신을 부름으로써 조율의 맥락에서 해석된다. 다신주의 철학은 겸손과 감사로 삶을 채움으로써 현재 ‘나’가 가진 것을 성스럽게 만든다.
호메로스는 복수의 여신들을 “역겹다.”라고 표현했다. 호메로스는 대지와 피의 여신들을 억압하고, 올림포스 신들에게만 특권을 주었다. 인간 감정의 위험한 측면을 직시하기보다는 비방만 했다. 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후 영웅적인 광기에 휩싸여 사흘 내내 트로이 성벽 주위로 시신을 끌고 다닌다. 호메로스는 악랄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는 않지만, 그것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신주의 철학은 현대인에게 ‘모든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지 말라. 감사하고, 겸손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전혀 무시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 다신주의 철학의 모든 양상을 적용하긴 어렵다. 예를 들어, ‘박사모’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은 이해에 도움을 준다. ‘박사모’ 인원들은 누구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열광한다.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생일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다. 대척점에는 박사모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호메로스는 ‘박사모’를 지지하는 세력도 부정하지 않고, ‘박사모’를 부정하는 세력도 긍정하지 않을 수 있다. 오직 정조에 이끌려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판단해야 할까?
호메로스와 달리 우리는 사실 관계를 중심으로 행동의 참과 거짓을 가려야 한다. 현대 사회의 교묘함은 성스러움을 악용할 수 있기에 우리에겐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신주의 철학을 삶에 적용하며, 어떻게 현실과도 보조를 맞출 수 있을까? 저자들은 ‘메타 포이에시스’ 개념을 제시한다. 호메로스 다신주의 철학의 특징은 피시스이다. 피시스는 ‘잠깐 반짝임’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순간적인 성스러움과 비슷하다. 하지만 피시스는 순간적이기 때문에 악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선동 연설같이 그른 믿음에서 시작된 성스러움이 삶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스러움을 느껴야 할 피시스를 분간해야 한다. 분간의 원동력은 메타 포이에시스다.
포이에시스적 실천은 사물들을 다루는 방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포이에시스적 실천 즉 창작적 활동은 특히 사물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장인의 기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 어떤 분야에 대한 초보적 기술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기술 즉 메타 포이에시스적인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피시스를 최선의 상태로 만들 수 있다. 피시스 현상을 솜씨 있게 가다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354,372)
Poem의 뜻은 모두가 알 것이다. 시 또는 시인. 포이에시스는 Poem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시는 장인의 숨결로 창작해야 하는 저작물이다. Meta는 ‘더 높은’의 뜻을 지닌다. 즉 메타 포이에시스는 더 높은 수준의 전문적 창의성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성스러움의 긍정성을 분간하기 위해 더 공부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겨 감사와 겸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동시에, 위험한 공작이나 선동을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은 근본적 피로를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메타 포이에시스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상과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피곤하다. 하지만 각자의 답을 찾아 나서는 피로이기에, 영감을 주는 피로이기에 오히려 피곤하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며 실력 부족의 한계를 느낀다. 마지막 저자들의 주장 요약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편이 낫겠다. 핵심이니 말이다.
우리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신주의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왜 이런 부름을 들어야 하고, 그 부름에 유념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반드시 응답할 이유는 없다. 부름이 있으니 문화와 풍부한 유산에 대해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들을 것이다.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신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왔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막았다. 신들이 우리에게서 퇴장했거나 우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발로 걷어찬 것이다. 우리는 현대적인 만신전을 세워야 한다. 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사 전체에 나타났던 실천적 관례를 모아봤다. 우리는 일신주의의 오랜 유혹에서 풀려난 지금에서야 이런 존재 방식들을 위한 자리를 오늘날의 세계 안에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현대적 다신주의 세계는 성스럽게 빛나는 것들로 이루어진 놀라운 세계일 것이다. (374~378)
이 글은 제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227542021
https://blog.naver.com/davichi023/221227544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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